"했지."
그녀는 날 보고 웃었다. 그녀도 내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두근거렸지만 나는 그럴거면 왜 나에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다. 그 뒤로도 그녀의 알 수 없는 질문은 계속되었다. 나는 이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지만 이유없이 끌려가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우리 다음에 또 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러자고 답했다.
그날 밤 술을 한잔 마셨다. 우리는 같이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것이 그녀와 함께하지 않은 유일한 것이었다. 작은 잔에 채워지는 투명한 액체를 천천히 비워가다보니 내 앞에 그녀가 앉아있는 것 같았다. 이유 모를 두근거림과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던 우리의 재회가 아른거렸다.
우리는 다시 만나면 안되는 사이였다. 이제 어렵게 그녀를 내 인생에서 지웠지만 다시 내 앞에 나타났고,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면 나는 다시 그 기억에 사로잡힐 것이 분명했기에. 그녀가 싫어하는 담배도 한대 태웠다. 그래도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 내가 그동안 적어왔던 우리의 이야기를 천천히 읽어보았다. 그저 소설일 뿐이지만 나는 그 속에서 우리의 숨결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글자 사이에는 차가운 감정만이 가득했다. 포근하고 생생한 사랑의 감정은 찾을 수 없었다.
매일 똑같던 일상은 그날을 이후로 조금씩 달라졌다. 누군가는 나에게 좋은 일 있냐고 물었고, 다른 누군가는 힘든 일 있냐고 걱정했다. 그렇게 며칠을 살아가던 중 그녀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우리는 다시 만났다. 검정색 코트 속에 흰색 니트를 입고 온 그녀는 예뻤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했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정도로 예뻤다. 예전처럼 손을 잡고 서로에게 기대진 않았지만 나는 그때의 기억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무서울 속도로 다시 서로에게 가까워졌다. 자기전에 전화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서로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나누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이런 관계에 대해 걱정도 고민도 많았지만 애써 외면하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다시 상처받을 것이라고, 과거의 그 선택을 다시 반복하면 안된다는 이성의 판단을 감정이 무시하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 작은 손을 잡았다. 마음을 고이 접어넣은 편지와 함께 사랑한다고 말했다. 다시 내 옆에 있어달라고 고백했다. 우리 좋았던 그날로 돌아가자고 속삭였다.
집에 돌아가니 좋다는 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었다. 그리고 나는 담배를 끊었다. 방에 앉아 술을 한잔 마시면서 천천히 글을 적어내려갔다. 그리고는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그녀를 내 인생에서 지우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다시 사랑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를 제외하고는 인생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나는 새로운 삶을 얻은 것만 같았다. 우리는 다시 아침마다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밤이 되면 서로의 목소리에 취해 잠들었다. 1년 전에 함께 걷던 한강을 걸었고, 손을 잡고 영화를 봤으며, 비슷하면서도 새롭게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이제는 웃으며 옛날 이야기도 나눴다.
하루는 같이 강릉으로 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아침 일찍 만나 밥을 먹고 기차에 앉아 손을 잡고 같은 노래를 들었다. 예전에 그녀가 나에게 처음 들려준 그 노래였다. 피곤한지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자는 얼굴에 나는 내가 다시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기차역에 도착하니 따스한 햇살이 거리에 만연했고 우리는 그 길을 천천히 걸었다. 그녀는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함께있는 것 만으로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바닷가 카페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밤에는 잔잔한 버스킹이 흘러나오는 모래사장에 앉아 바닷물에 일렁이는 불빛들을 보았다. 처음으로 같이 술도 마셨고 밤새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였다.
다음날 일찍 일어난 나는 혼자서 바닷가를 걸었다. 평생을 서울에 살아서 그런지 바닷가에 오면 사람들이 많지 않은 이른 아침의 바다의 소리가 참 좋다. 어젯밤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 되새기며 길을 걸었다. 그녀는 나에게 자기를 잊지 않아줘서, 그리고 다시 손을 내밀어줘서 고맙다고 마음을 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그녀와 쌓았던 추억은 내 몸에 문신처럼 남아 열심히 지우고 새로운 기억도 덮어봤지만 결국 남아있었다.
어젯밤 바닷가에 있던 모래사장이 결국은 무너지고 그 속에 들어있던 작은 바스켓처럼 잠시 숨어있던 것이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술기운이 올라 붉게 달아올랐던 그 보드라운 뺨과, 우리가 나누었던 사랑이 떠오른다. 찌질한 전애인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몇 번이고 고민하고 보냈던 연락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 모든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방에 돌아오니 그녀가 나를 반겨준다. 잠깐 걷고 왔다고 하니 자기도 같이 가고 싶었다며 귀엽게 투정을 부린다. 웃으며 그녀를 안았다. 그녀도 내 목에 팔을 두른다. 우리는 3층에 내려가 조식을 먹고 짐을 챙겨 카페로 향했다. 바다가 보이지는 않지만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바람과 냄새가 느껴졌다. 사장님 혼자 운영하시는 작은 나무로 된 카페에 도착했다.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사장님이 천천히 내려주시는 드립커피를 마시며 창밖에 흔들리는 고목(古木)을 바라본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마 우리 부모님이 태어나시기도 전부터 있었겠지 싶다. 한 자리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나무의 기분을 상상해본다. 지루하겠지만 어쩌면 주변의 공간이 나만의 공간처럼 느껴질 것 같기도 해 부러운 마음도 조금 품어본다. 내 몸을 불탈 듯 뜨겁지만 그늘을 만들어 사랑하는 것들을 지킬 수 있는 나무가 멋져보이기도 하다.
고소한 커피를 마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피곤하지만 끝까지 맞잡은 손을 놓지 않고 그녀의 집 앞까지 함께했다. 조심히 들어가라고, 다음에는 더 좋은 곳으로 놀러가자고 말을 전하고 내 품에 안긴 그녀를 몇 번 쓰다듬어본다. 사랑한다고 말하니 수줍게 웃는 얼굴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직까지 두근거림이 잦아들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은 내 인생에 비하면 아주 작은 부분이겠지만 그 무엇보다 큰 영향을 주고 있음이 느껴진다. 만날 때 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기분이 좋은 사람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 적어도 그날 나에게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