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도 그 사실을 알았다. 알 수 밖에 없었다. 내 모든 말과 행동들이 설명해주고 있었다. 오늘은 고백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그녀와 데이트를 한 것이 몇번이나 되지만 용기가 없던 나는 결국 말하지 못하고 아쉬움만 남긴 채 집에 돌아왔었다.
그렇게 혼자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착잡함과 한심함이 나를 덮쳤다. 사랑하는 여자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바보같은 내 모습이 한심했지만 점점 생각은 그녀가 내 고백을 피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것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나는 우울했고, 그녀가 잘 들어갔냐는 연락을 보내오면 다시 행복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그녀가 없는 내 삶은 없었다.
몇번째 데이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가을의 어느날, 우리는 다시 서로의 앞에 섰다. 와인을 한잔 마시고 감각적인 골목들을 걸었다. 밝게 빛을 내뿜고 있는 멋진 건물들 사이를 우리 둘만 걸었다. 그 넓고 조용한 공간에 오직 우리 둘만 있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대화를 나누면서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골목의 한 벤치에 앉아서 나는 그녀에게 내 마음을 보여줬다. 물론 이미 내 마음을 다 알고 있었겠지만.
나는 앞으로 같이 행복하자고 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손을 잡았고, 집에 바래다주면서 우리의 사랑이 시작됐다.
첫 연애는 아니었다. 그러나 첫 사랑이었다. 같이 있으면 시간이 참 야속하게 달려가고, 같이 없으면 그 사람만을 생각했다. 특히 그녀와 함께 들었던 노래를 만날때면 나는 구름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의 사랑에서 가장 생각나는 장면은 그녀의 생일이다. 나는 가장 좋아하는 책 한권과 아름다운 꽃말을 가진 꽃 한송이, 그리고 마음을 꾹 눌러담은 편지를 선물했다. 비싼 목걸이도 아니었고, 누구나 꿈꾸는 근사한 선물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에게 안겼다. 우리는 작은 이자카야에 들어가 어깨를 맞대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속삭였다. 창밖에 지나다니는 것들을 같은 방향에서 바라보며 손을 잡고, 서로에게만 들릴 것 같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많은 순간들을 함께했다. 여느 연인들처럼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산책을 했다. 우리는 둘다 걷는 것을 좋아하고 그 어떤 것들보다 서로 나누는 말들이 가장 재밌었기에 많은 시간을 거리에서 보냈다. 내가 좋아하는 동네를 걸으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의 그 추억들이 내 연애관을 만들어줬다.
그녀와는 참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매주 비슷한 삶을 살았지만 매주 새로운 말들이 우리 사이를 오갔다. 가장 재밌게 봤던 '비포 선라이즈' 속의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처럼.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짐이 아닌 도움이 되는 관계를 추구했다.
그녀는 질투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여자친구에게 더 믿음을 줄 수 있게 노력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보내고, 하루가 끝날때쯤 만나 와인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사랑은 그 형태도, 실체도 알 수 없는 것이라지만 내가 했던 그것이 지향하는 사랑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연애였다. 남들이 다 하는 그런 연애. 오직 나와 그녀만 그 황홀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래서 더 큰 힘을 가지는 기억이다. 가끔 생각나는 매운 떡볶이보다 매일 먹는 집밥이 더 강한 힘을 가진 것 처럼 어느순간 내 일상의 많은 부분이 그녀에게 잠식되어갔다. 그녀가 없는 삶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어렸기에, 언젠가 끝이 날 확률이 훨씬 크다는 것을 서로가 알았지만 세상 모두가 아닐 것이라고 말해도 우리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사실 나만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그저 말 뿐이라는 아픈 사실을 깨닫는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 속삭였지만 결국 그 영원성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나에게 많은 감정들을 가르쳐준 사람이 내 모든 감정을 빼앗아갔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담담히 뱉어내던 그 날, 나는 이상하게 슬프지 않았다. 당장 내 옆에 그 사람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드디어 찾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의미와 지금까지는 없었던 유형의 행복을 잃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붙잡지 않았다. 나중에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생각했을 때 나를 조금이나마 더 짙게 기억하기를 바래서였다. 그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분명 오겠지만 그날의 내 선택을 그랬다.
몇주간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바쁜 일이 끝나고, 시험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다시 웃으며 한강으로 향할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 공허함이 나를 찾아왔고 나는 그것을 외면하기 위해 쉬지않고 움직였다. 하루종일 일을 하고, 생각없이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바쁘게 살면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지만, 숨을 돌리는 순간이면 빠짐없이 나에게 돌아와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힘든 몇달이 지나니 나는 완벽히 잊을 수 있었다. 이제 우리가 함께 갔던 식당을 웃으며 다른 사람과 찾을 수 있었고, 그녀가 처음 들려준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다보면 많은 감정이 쏟아져 내려온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차갑게 굳어진 채로 나에게 다가온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차분하게 내 이야기를 적어내려갔고, 내가 좋아하는 책과 영화를 상상하며 그 글을 소설로 만들었다. 내 글을 읽고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 부끄러워 가상의 이야기를 넣기 시작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읽고 나를 다시 떠올리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정말 그녀가 내 글을 읽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겠지만 그냥 그런 마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해야할 일과 글쓰기에 열중하며 살아왔다. 간지러운 사랑의 숨결이 가득한 이야기, 십년뒤의 나를 상상하며 적어내린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오래 지속된 세계 속의 이야기.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몇번의 사람이 더 찾아왔다. 그 중에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기억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내 마음에 각인된 그날의 사랑은 그 후의 모든 만남의 기준이 되어 나를 차갑게 만들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관계를 시작해도 그 기준이 순수한 나의 마음을 평가했다. 그녀를 잊지 못한 것은 분명 아니었지만, 과거의 인연 중 하나에 그치는 그저 그런 기억은 아니었기에. 시간이 흘러 많은 상황이 변하고 몸과 마음은 그때와 달라져 있었다. 이제는 더이상 그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물론 가끔 이유없이 얼굴이 떠오른 적은 있었지만 나를 많이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난 그녀는 내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고 말았다.
우연은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만났고, 다시 걸었다. 이야기를 나눴으며 우리가 함께 가본적 없는 새로운 골목을 걸었다. 처음 가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때까지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그 말 한마디에 내 심장은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 생각 너는 안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