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사랑은 각자만의 정의가 있다. 매일 보고 싶은 사람,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은 사람. 우리는 주관적인 사랑의 정의가 있고 그 속에서 다 다른 사랑을 만나며 살아간다. 그 중에서 첫사랑은 남자가 절대 잊을 수 없고 생각만 해도 아련한 그런 사랑이다.
나에게도 그러한 첫사랑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과의 기억은 내 몸에 문신처럼 남아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할 때 조차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대학 주점에서 처음 만났다. 축제에 온 수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가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나눈 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보다 더 범상치 않은 만남이었다. 그녀는 참 예뻤다. 귀여운 고양이상의 여자였고, 시끄럽고 정신없는 사람들 속에서도 수줍게 웃으며 우아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나는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어도 말을 먼저 붙이지 못하는 성격이기에 이번에도 스쳐갔던 사람들 중 한명이겠거니 생각했지만 그날의 나는 왠지 모를 자신감을 느꼈다. 술기운을 빌려 그녀에게 다가가 가볍게 인사를 하고 연락처를 받았다.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했다.
어색하게 연락을 시작하고, 아무런 흥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다가 우리는 약속을 잡았다. 을지로에서 만난 그녀는 역시 그날도 예뻤다. 우리는 작은 바에 들어가 하이볼을 마시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아주 얕게 알고 있던 서로를 조금 더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대화를 나누며 둘 사이의 공간에 천천히 웃음이 채워져갔다. 처음 둘이 만나는 자리였고, 그녀는 마음의 문을 쉽게 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쉽게 그녀가 아직 나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조금씩 다가갔다. 너무 서두르지 않더라도 내가 출발했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아직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게 느끼지 못했지만 다시 만나고 싶다는 감정만은 확실했다.
매일같이 핸드폰을 쥐고 있는 나와 다르게 그녀는 연락을 잘 보지 않았다. 몇시간마다 오는 연락에 나는 3분도 지나지 않아 답하며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고, 몇번의 대화가 오가고 나면 다시 나는 기다리는 처지였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오늘은 어떤 수업이 있는지, 끝나고 어떤 것들을 하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의 연락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주고받는 메세지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연락이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지극히 평범한 내 일상을 함께하고 싶다는 욕구의 반증이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시작하거나 끝맺을때 할법한 의미없는 말들이 이어지다 내가 먼저 또 보자고 했다. 내가 나름 마음에 들었는지, 그냥 할 게 없어서 나왔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나왔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우리는 많이 달랐다. 거의 모든 것이 달랐던 것 같다. 이런 우리가 같은 마음으로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감동을 주는 가사와 세월의 성숙함이 느껴지는 음색의 발라드를 그녀는 좋아했다. 우리는 LP바에 가서 서로 좋아하는 노래들을 신청하고 함께 즐기면서 더 깊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잠시동안은 흘러나오는 음악에 집중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고, 노래 가사를 다시 곱씹으면서 그 의미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서로의 문을 두드렸고, 그 문은 조금씩 열리는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싶은 것들에서 나에게 사랑이 가지는 의미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많고 재밌는 대화가 있었다. 특히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때 그녀는 참 즐거워했다. 우리의 신청곡들은 하나같이 서로의 취향을 저격했고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의 그 노래들을 듣는다. 술이 조금씩 들어가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만연해지던 순간 우리의 대화 주제는 '사랑'이었다. 어떤 연애가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지. 더 나아가 너에게 사랑은 무엇이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사랑은 그 형태를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 정말 있기는 한 것인지 아무도 확실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날 밤 우리 사이의 공간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느꼈고,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을 직감했다.
아주 오래된 친구들 두세명과만 나누는 대화를 고작 세번째 만난 여자랑 주고받고 있었고, 어떤 순간보다 대화의 내용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 앞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는 것도,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는 음악에 집중하는 것도, 우리가 나누고 있는 말들을 곱씹어보는 것도 모두 행복한 순간이었다. 너무 늦기 전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그날 밤을 쉽게 보내지 못했었다.
데이트가 끝나면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곤 했다. 처음에는 혼자 갈 수 있다고 거절하던 그녀도 이제는 나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을 하루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 순간이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순간이다.
어두운 밤 서촌의 골목길을 걸었다. 외롭게 혼자 서서 자기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은 가로등들을 지나, 가끔 보이는 부드럽고 어두운 낭만이 흘러나오는 가게들을 지난다. 걸으면서 나누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들, 그것이 내 하루의 디저트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먹어야 다시 돌아온 햇빛을 이겨낼 수 있었고 점점 그 이야기의 주제는 다양해져 갔다. 우리 각자의 이야기에서 우리 사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미묘한 감정에 이르기까지 서로의 속마음을 많이 뱉었고 우리는 서로의 것들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나는 이제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뿌린 감정의 씨앗이 어느순간 어마어마한 크기의 싹을 피우고 있었다.
아마 이런게 사랑인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