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에서의 3일째, 빈트가르에서 함께한 친구들과 헤어지고, 블레드 호수에 도착했다. 사람도 별로 없는 한가한 오전 시간이었다. 호수의 주변은 잘 정돈되어있고, 조경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사람 손때가 많이 묻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알프스의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이 호수의 강렬한 푸른빛과 그 위를 떠다니는 백조, 오리들, 그리고 내가 앉아있는 초록의 잔디밭이 마치 새 물감을 막 팔레트에 짠 것처럼 본래의 본연의 순수함은 간직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내 몸은 빈 벤치에, 내 눈은 호수에 맡겨뒀다. 특별히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단지, '아! 좋다!'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한국에서 갉혔던 나의 마음을 치유받는다는 느낌도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1차원적인 사람이었나?' 라 느낄정도로 단순한 감흥이었다. 자연 속에 없으면 느끼기 힘든 감정이었다.
오리 무리들이 내 발 앞을 지나가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눈 앞에는 어제 올라갔던 절벽에 블레드 성이 아찔하게 세워져 있었고, 시선을 호수로 내리니 작은 섬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배들이 그 섬을 향해 노 저어 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배가 모여져 있는 곳을 가보니 마침 사람들이 배에 타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엉겁결에 끼어서 배를 타게 탔다. 배의 사공은 직접 노를 저어 사람들을 섬까지 안내해주고 있었다. 주변에서 보고 있었던 호수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뱃머리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물결을 손으로 느껴보며 그렇게 호수의 한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섬으로 향해 갔다.
보트에 내려 도착한 섬에는 작은 성당이 있었다. 성당에 들어가 소원을 빌면서 종을 울려보고, 종탑에 올라가 어제 올라갔었던 트리글라브 산과 며칠 동안 머물렀던 블레드 마을의 전경을 감상했다.
블레드에서도 마찬가지로 자그맣게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있었고, 슬로베니아에서 먹을 수 있는 거리 음식을 팔고 있었다. 그 음식이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생맥주 한잔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먼길을 떠날 채비를 하였다.
류블랴나로 떠나고 싶었지만, 동유럽에 머무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하루빨리 동유럽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크로아티아 자크레브로 떠나야 했다. 블레드에서 자그레브로 가기 위해서는,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로 이동해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블레드에서 버스를 타고 류블랴나 역에 도착한 나는 다행히 별 일없이 자그레브행 기차를 구입했고, 햄버거 하나로 저녁을 채우면서 기차를 기다렸다. 이미 해가 져 어두운 저녁이 되었다.
기차 안에는 사람도 많지 않아 조용했다. 슬로베니아로 왔을 때처럼 또 기차를 잘못 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했지만 크로아티아 군인들이 내 신분증을 확인하는 것을 보니 다행히 이번에는 제대로 가고 있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나는 늦은 저녁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푸른 빛이 담겨있던 슬로베니아 블레드_photo by Gabriel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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