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나를 생각하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탑승했다.
모스크바까지 9260km, 6박 7일이나 걸리는 대장정이다.
내가 탄 열차는 4인실로 되어있는 2등석 쿠페.
횡단 열차는 출발일로부터 한 달 전쯤에 열리는 것 같은데 2등석 중에서도 가장 앞칸, 순방향으로 예매를 했다.
(부모님, 친구들 몰래 나는 한 달 전부터 회사를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에 한두 번 정도 잠깐 정차해서 내리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하는 것이 없었다.
오직 가만히 방에서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좋은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방에서 생각을 하라고 하려니 막상 '내가 이 열차를 타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될까?', '어떤 고민을 해야 될까?'라는 근본적인 질문들로 넘어가게 되었다. 어쩌면 여행에서 생각을 해야 되고, 깨우침을 얻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여행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그래서 너는 여행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왔니?'라며 물어봤을 때 이야기하지 못할 것 같아 겁이 났다. 여행에서 만큼도 성과나 인정을 받으려고 한 내가 더욱 싫어지기도 했다.
열차는 밤새 한 겨울의 시베리아 대륙을 달린다
나는 가장 넓은 곳에 있지만, 가장 좁은 곳에 있다.
이 말이 나의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인 것 같다.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자랑할 만한 멋진 사옥을 가지고 있는 회사에 다니면서, 대한민국의 가장 넓은 곳에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이 안을 또 들여다보면 가장 좁다고 느낀 것이 초년기를 돌이켜본 회사 생활이었다.
내가 이번 여행을 하게 된 가장 큰 결심 중 하나는, 내 젊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나는 사회생활에서 젊은 애가 패기도 없다, 노력이 보이지 않다.. 등 충고 아닌 충고를 종종 들었었다. 이 중에 몇몇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고 고치려 했지만, '노력'과 '패기'에 대한 비난은 나에게 있어 가장 억울하면서 화가 났었다.
젊음은 그 자체로 패기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패기는, 일종의 패기로 포장된 복종을 의미한다. 그들이 의미하는 패기가 이런 의미라면 나는 이겨내지 못했다고 인정을 한다. 하지만 복종을 패기의 전체로 생각한다면, 나의 젊음에 대해 비난을 하는 것이니, 억울하면서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횡단 열차에서 분노의 생각을 쏟아내는 동안 어느새 기차에서 시간은 3일이 지나있고, 4천 km 지나 슬류디안카를 지나고 있었다. 새벽 1시쯤인데, 이 날은 차 복도 칸에 미등을 켜놓고, 사람들이 차창밖을 보고 있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깊은 호수인 바이칼 호수를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횡단 열차를 조금만 더 알았더라면, 이르쿠츠에서 한번 내려서 바이칼 호수를 구경하고 다시 새로운 기차를 탔을 것이다. 하지만 차창밖으로 보이는 설경만으로도 아쉬움을 달래기에는 충분했다.
새하얀 눈밭에 금방이라도 늑대들이 뛰어나올 것 같은 높고 낮은 뾰족한 나무들이 밤의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면 그 뒤에는 까만 바이칼 호수가 나머지 배경의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 달빛에 비친 새하얀 눈이 이 호수와의 경계를 더욱 뚜렷이 하고 있다. 호수 주위를 돌고 있는 열차의 선두를 보고 있으면 은하철도 999처럼 금방 별나라로 날아갈 것 같다.
밤의 바이칼 호수를 보면서 사람들이 왜 흑백 사진의 공허함에 열광을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흑백사진을 감상하고 있으면 어느새 내 감정으로 그 그림에 색을 칠하고 있다. 이 바이칼 호수의 밤의 설경도 마찬가지다. 내가 듣는 음악대로 바이칼 호수는 음악이 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까만색으로 수평선의 구분만 지어주는 바이칼 호수, 그리고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을 자극하게 만드는 경치가 내 마음을 자극하게 만들었다.
열차에서 지난 3일간 나 혼자만 삭히고 있었던 감정들을 다 드러내고, 아무것도 없이 다 비워냈을 때 바이칼 호수는 나를 치유해주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심한 화상을 입으면 살갗을 다 드러내고 치료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나에게는 다 털어버리고 다시 새로운 것을 채우는 일만 남았다. 여행의 의미를 찾고 즐길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다.
인천 - 블라디보스톡 - 시베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