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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May 26. 2021

우리가 끊임없이, 소외되는 이유.

여덟.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이면에 인간의 소외가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우리는 부의 격차로 어떻게 개인의 계급이 나뉘고, 또 가지지 못한 자들이 어떻게 소외되어 왔는지 잘 알고 있다. 시장의 모습과 자본의 의미가 달라진 지금, 우리는 인간의 소외와 외로움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 사회에서, 자본은 다원적인 성격을 지니며 확장된 의미로서 이해된다. 시장과 기술의 발달로 인해, 유형자산 뿐 아니라 무형자산, 혹은 (자산으로 바꿀 수 있는 잠재적 의미의) 간접자산의 교환 및 거래가 가능해졌다. 이렇게 고도로 발달한 시장경제 사회에서, 대부분의 “것”들은 사고 팔 수 있다. 그”것”들은 단순히 물건, 서비스가 아니라, 인간이 가치를 두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자본은 이제, 더 이상 좁은 의미의 화폐나 금융자산 따위를 가리키기보다는, 더 넓은 의미에서 무형의 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제적인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모든 간접적인 자산(asset)을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질서에서, 개인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선천적 능력/특징들을 자라면서 자기 계발을 통해 고도로 발달시킴으로써, 자신의 시장에서의 가치를 높인다. 개인이 보유한 자원/자산이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것이든, 사회적으로 배양된 것이든, 결국 개인은 그 자원의 사회경제적 가치가 높은지 낮은지에 따라 사회/관계 속에서 우위 혹은 열위를 점하게 된다.


단순히 공부를 잘한다든지 축구를 잘한다든지 등의 기준뿐만 아니라, 인성이 좋다든지 재밌다든지

등의 다양한 기준과 잣대 속에서, 개인은 좋음과 나쁨으로 끊임없이 판단되고 평가된다. 특히, 인성이나 도덕성은 모두 동일한 능력을 타고났다고 무의식 중에 생각해버리기 쉬운데, 머리가 좋고 나쁨처럼 타인의 감정을 잘 읽거나 공감하는 능력 혹은 감수성은 세상에 날 때부터 개인 간에 격차가 크게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잘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가정이나 학교에서 어른들은 인성과 관련된 능력들을 적게 타고난 아이들을 “나쁨”으로 꼬리표 붙이고, 착한 아이와 대조적으로 (수직 구도 상에서) 열등한 존재로 평가한다.


아이들이 타고난 능력에 따라 평가받는 현실에 폭력성이 존재한다고 인정한다면, 인성/도덕성 관련 선천적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에게 “나쁜 아이” 꼬리표를 붙이는 행위도 폭력적인 것이다. 이러한 폭력적인 관습은 개인에게 상처를 남기며 사회에서 소외를 경험케 한다. 사회적으로 이 능력들을 교육시키는 것은 중요하지만, 특정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계급”을 나누는 관습은 인간을 때때로, 또 자주 외롭게 할 뿐이다.


물론 여러 차원에서의 “계급” 혹은 위계질서는 인간사회에 예전부터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초발달한 시장 내에서 개인이 지닌 다양한 특징/능력들을 돈으로 (직간접적으로, 혹은 잠정적으로) 교환될 수 있게 되면서, 각 능력마다 개인은 좋음과 나쁨으로 더욱 잔인하게 평가되고 여러 차원에서 “계급화”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전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어떠한 형태/유형의 자본이든지 간에,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로 계급이 나뉘며, “덜” 가진 쪽은 사회/관계에서 소외를 느끼게 된다.


자본이 다원적인 측면에서 확장된 의미로 개념화된 우리 사회에서, 개인은 다양한 층위와 차원에서 소외를 경험하고 있다. 경제적 부 이외에도 다양한 차원에서 우리는 (부르디외가 설명한) “구별짓기”를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구별짓기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소외”시키기”와 소외”받기”를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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