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유튜브에서 90년대 영상들을 “우연히” (사실은 알고리즘의 ‘권유’로) 보게 되었다. 30여 년 전 영상이 영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화면의 색감, 화질, 세트장의 구성이 달라졌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영상들이 어색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말’ -언어- 때문이었다.
신기했다. 당시에는 너무 당연하고 또 익숙하게 느껴졌던 단어의 사용, 말의 억양, 맥락의 구성 및 말속 숨겨진 뉘앙스가 지금은 너무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그동안 우리가 쓰는 말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서서히 그 모습과 형태가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동일한 장소에 머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소가 시간의 흐름에 변화함에 따라, 사람들이 이 같은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언어의 모습을 조금씩 바꿔오고 있었던 겻이다.
언어는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에 따라서도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영수의 언어, 유미의 언어는 비록 둘 다 우리말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다르다. 이 같은 다름은, 그들의 가정에서, 그들이 만나는 친구에게서, 그들이 접하는 미디어에서, 즉 이 두 사람이 처하는 모든, 상이한 경우의 수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언어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고, 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 장소, 상황에 ‘접착’되어 있다. 이러한 언어의 접착력(stickiness)으로 인해 ‘언어’는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지금껏 겪어온 상황들의 결과물 (혹은 부산물)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어쩌면 내가 하는 말, 타인이 구사하는 언어는 개인의 삶의 흔적이다. 개인이 처해온 바꿀 수 없었던 여건에 의한 자신의 말과 언어적 습관들에 대해 창피해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주어진 상황 속에서 보다 나은 생각과 말을 하는 것에는 책임을 느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