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좋은 글이란 만져지는 글이다. 글이 담을 수 있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 것이어서 글쓴이가 상상한/생각한 내용 그 자체를 읽는 이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다. 글의 목적은 글의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내용을 공유 및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글이란 이러한 목적 -즉 보이지 않는, 그러므로 아직 추상적인 상태에 있는 글의 내용이 될 무언가를 글쓴이의 의도와 생각에 가장 근접하게 표현하는 것-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말로는 쉽지만, 이렇게 목적에 충실한 글을 쓰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 까닭은 첫째, 글쓴이와 읽는 이가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온 전혀 다른 두 개체이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둘째, 글쓴이가 표현한 그대로 읽는 이에게 완벽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마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방법을 설명하는 데에는 수 만 가지 이론이 있겠지만, 위에 나열한 두 가지 현실적 제약에 기반하여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방법을 논하여 볼 수 있다. 나 말고 타인이 내 글을 접할 때에 내가 A라고 표현하면 이에 대해 읽는 이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지, 더불어 내가 의도한 방향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한지 등에 대하여 충분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때 특히 타겟이 되는 독자층을 설정하면 고민이 한결 쉬워질 수 있다.
또한, 글을 쓰는 나와 읽는 이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나라는 사람이 경험한 세계를 기반으로 인지한 결과물인 생각, 기억과 감정 등을 읽는 이가 (더군다나 대화를 통해서가 아닌 글을 읽는 행위만으로) 함께 공유하는 일은 어렵다. 따라서 무릇 좋은 글이란 읽는 이가 나의 특정 생각이 비롯된 내가 경험한 세계를 간접적으로, 그렇지만 가장 가능한 한 완벽한 방식으로 지각할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좋은 글은 그 생각이 둥둥 떠다니는 글보다는, 글쓴이의 생각이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글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좋은 글은 자주 인용이나 읽는 이가 글쓴이의 상황에 대입할 수 있는 비유, 자세한 설명, 경험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윤동주 <자화상>을 좋아하는데, ‘만져지는 글’의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이 시는 아마도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쓰였을 것만 같다. 윤동주 선생님의 시가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고 2020년을 사는 우리에게도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의 시에서 그가 경험했던 순간과 향유했던 감정 및 생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어서, 그러니까 다시 말해 우리에게 그것들이 ‘만져지기’ 때문이다.
연기자가 여러 가지 상황에 따른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일에 많은 고민과 연습이 따르듯, 작가 역시 다양한 생각과 감정, 정보를 정확하고 세밀하게 글이라는 매체에 옮겨 담기까지 끝없는 (정말 말 그대로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면 마침내 좋은 글이 얻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