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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쩨이 Jul 13. 2020

일본 대학원, 모든 꼰대는 신입생이었다.

그 꼰대, 제가 안해보겠습니다.

연구실에 들어오면 입구 근처에 제법 커다란 화이트보드가 있다.

랩 미팅 스케줄, 학교 공지, 시약을 파는 업체의 캠페인 정보 등등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화이트보드의 주목적은 사실 멤버들의 출석 체크용이다.


가장 아래에 붙어있는 교수님의 이름을 필두로 위에서부터 이 연구실에 온 순서대로 이름이 붙어있다.

이름 옆에는 인/다른 캠퍼스/아웃 란이 있어 자기가 현재 있는 곳에 자석을 붙여두는 형식이다.

연구실 첫날을 떠올려보면 마치 어제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나는 위에서 5번째에 이름이 붙어있는 멤버가 되었다.


연구실에 와서 초기에 했던 일은 논문 읽기와 연구실 서랍을 여기저기 다 열어보고 다니기였다.

앞으로 할 연구에 관해 공부를 해야 하니 논문을 읽고 새로 온 곳이라 뭐가 어디 있는지 모르니 서랍을 열고 다니며 위치를 외워뒀다.


우리 방의 특성상 화학과 생물이 섞여있는데 (그렇다! 고등학교 때, 혹은 학부 아가일 때 화학과 생물을 따로 배우고 다른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화학은 마치 소금처럼 여기저기 다 필요하다는 걸 모두들 알아야 한다!!) 올해 신입생들은 전부 화학을 백그라운드로 삼는 아가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생물 관련 실험을 하면 누군가를 쪼르르 찾아가 물어보며 배워야 하는 상황이 된 것.

보통은 화이트보드 가장 위에 있는 준교수에게 배우게 나는 한 발짝 물러나 있다.

준교수가 퇴근했거나 자리가 내 근처인 아가들이 가끔 나한테 찾아와서 물어보곤 하는데 그 질문이라는 것이 아래와 같은 식일 때가 있다.

아가-국이 짜요!

나-..? 뭘 넣었는데?

아가-국이 짜지는 거..?

나-(가득한 물음표)

소금이 필요하다면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 있지만 이런 식의 질문을 들으면 한 동안 물음표 속에 잠긴 채 어딘가를 표류하는 기분이 된다.

처음에 그 물음표들은 실험에 관련된 것들이다가 종국엔 내가 소위 말하는 꼰대라 이해할 수 없는 건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물음표로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나 또한 화학을 베이스로 삼았었기에 다른 분야의 실험을 할 때의 막막함을 알고 있고,

박사 과정 중에 한 때 혼자 프로젝트를 3개 돌리느라 새벽 6시에 퇴근해서 아침 9시에 출근하기도 하고, 일주일 동안 TA가 있는 날만 밥 한 끼 먹은 날들도 있었다.


나는 우리 신입 아가들이 나처럼 고생하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싫은 내색 없이 도와주려고 노력한다.


만든 음식이 싱거워서 무언가 추가하고 싶을 때 선배에게

소금을 레시피대로 넣었는데(현재까지 진행 상황)도 간이 싱거운 거 같으니(문제) 간이 될 만한걸 넣고 싶어요(나름의 해결방안을 제시), 뭐가 좋을까요? 

맛없어요(????), 어쩌죠?

하는 두 질문을 생각했을 때,

질문을 하는 사람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많이 다르게 느껴진다.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은 내가 해서 잘 알고 있는 것뿐 남들은 모른다.

상대를 어떻게 꼰대로 만들지 고민이라면 그걸 잊고 상대에게 질문을 해보자.



선임이 된다는 건 사실 꽤나 번거로운 일이구나 하는 걸 깨달아가며

나는 '꼰대'라는 단어에 신입 때 나도 저랬나? 하는 의문과 함께 내가 이렇게 꼰대가 되어가나 하는 기묘한 자괴감이 든다.


나의 포장된 상냥함으로 아가들에게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힘낸 것처럼 나한테 배운 아가들이 그러길 바란다.

모든 꼰대들은 신입생이었지만,

모든 신입생이 꼰대가 되는 건 아니겠지?

라는 기묘한 믿음을 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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