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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리 Mar 24. 2020

삶의 가치가 아니라면 죽음의 가치

엄마 사고 이후 요양원을 상대로 진행하려고 하는 소송은 두 가지다. 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형법’과 ‘노인복지법’에 의거해서 타당한 벌을 내려 달라고 호소하는 ‘형사 소송’과, 이번 사건으로 인해 우리 가족에게 끼친 손해를 배상해 달라고 요구하는 ‘민사 소송’이다. 두 가지를 함께 준비하면서, 변호사는 우리가 피고소인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배상액이 얼마쯤 되는지 물었다. 난감했다. 도대체 얼마를 불러야 하나. 오빠와 나는 소송을 시작할 때부터 엄마의 죽음을 통해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선비처럼 고고하게 우아한 척하자고 그러는 게 아니라, 엄마가 그렇게 간 후 돈을 받는다 한들 나와 오빠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혹시라도 남들에게 ‘엄마 덕에 주머니 두둑해졌다’는 손가락질이나 받을 거라면, 차라리 돈을 안 받는 게 나았다. 


그렇다고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엄마를 급작스럽게 하늘로 보낸 이들에게 그 죄를 최대한 강하게 묻고 싶은데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않으면 그만큼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액수도 문제였다. 사람이 죽었는데, 이미 엄마는 없는데 그 ‘손해’를 어떻게 액수로 책정하는가. 


변호사는 비슷한 사건의 판례를 들어주며 그 배상액은 2천~3천만 원 정도였다고 말해주었다. ‘얼마인들 무슨 상관이겠는가’라고 생각하던 나조차도 그 액수를 듣고는 허탈한 충격에 빠졌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 배상액이 ‘1억’도 안 된다고? 이런 일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르고 살아와서 내가 너무 순진한 건가? 최소한 생명을 앗아갔다면 평범한 사람이 은행에서 대출받기도 힘든, 막말로 ‘억’ 소리가 나는 그런 액수여야 맞는 것 같은데, 내가 이상한 걸까? 


“난 10억은 불러야겠다”


역쉬. 오빠는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 판례의 액수가 너무 적어 한탄스럽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판례를 감안해서 ‘억울함을 표현하기 위해 1억은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조심스레 변호사와 상의하던 나와, 오빠는 ‘발끈’하는 데에 있어 차원이 달랐다. 난 평소 여러 가지 언어로 설득을 하면서 그런 오빠를 ‘현실의 세계’로 끌어들이느라 애를 먹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나 대신 ‘질러 줄’ 사람이 옆에 있어 든든하기도 했다.  


변호사는 너무 높은 금액을 불러도 판사 입장에서는 터무니없다고 판단해 우리가 패소할 수도 있으니 판례에 근거해서 적절한 액수를 정해야 한다고 가이드했다. 더불어 이런 이야기도 해주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액수로 매기기 힘들기 때문에 사망 사고의 손해배상의 경우 ‘망자가 직업을 가지고 월 얼마를 벌다가 은퇴까지 몇 년을 더 벌 수 있었는데 사고로 인해 그 금액을 못 벌었다고 치고’ 금액을 산정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즉, 젊은 사람이 한창 일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게 되면 그의 현재 연봉과 더 일할 수 있는 연령까지 남은 기간을 기준으로  손해배상액을 청구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 기준으로 치면, 일하지 않고 있던 취준생이나 노인, 어린아이는 그 목숨 값이 제로라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그런 기준이 어느 정도 감안된다는 것을 알고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연한 현실인 줄 알면서도, 나는 변호사의 설명에 설득되기가 힘들었다. 




사실 엄마가 환자로 지내는 모습을 오랜 시간 지켜보며 ‘엄마의 인생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회의감을 품어왔고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노인의 삶의 가치’라는 주제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왔었다. 내가 어린아이 둘을 키우기도 힘든 시기에게 엄마의 뇌질환으로 가족 모두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원망스러워 투덜댄 시기도 있었지만 아픈 엄마에 대한 강한 애증이 마음 가득 차오르면 차오를수록 반대로 ‘엄마가 무슨 잘못이야. 아프고 싶어 아팠나? 이렇게 아픈 엄마도 인간으로서 잘 대우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거잖아?’라는 안타까움 또한 크게 동반되었다. 엄마가 그저 가족에게 짐이 되는 치매 노인이라는 짜증이 들면 들수록 마음 반대편에서는 ‘아닌데, 고생 많이 한 우리 엄마, 참 소중한 사람인데.’라는 반문 또한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친정 엄마를 환자로 두고 요양원에 모신 자식으로서의 죄책감과 어쩔 수 없다는 합리화를 동시에 반복하면서 과연 이 세상이 늙고 병들어 가는 노인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고민했던 것 같다. 


고민은 많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노인의 삶에 대한 사회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좀 더 공부해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어린 시절 못 배우고 일찍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오빠와 남동생의 배움에 일조한 공을 생각하면 엄마는 ‘치매 노인’이라는 한 마디로 판단받을 인생이 아니다. 결혼해서는 애 낳고 또 돈 버느라 고생한 엄마의 젊은 시절을 놓고 보면, 엄마는 자식들에게 ‘엄마 때문에 힘들다’라는 소리를 함부로 들을 그런 인생이 아니었다. 

지난 인생의 고단함과 세상에 대한 기여를 생각하면 엄마를 비롯한 이 세상 모든 노인들이 그저 ‘나이 들어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취급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먼저 노인들 자신부터, ‘이제 살날들도 얼마 안 남았는데….’라는 소리를 하지 말았으면 했다. 건강하게 잘 살고 싶다는 사람의 본능적 욕구가 딱 60세가 넘자마자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않는가. 나이를 세는 숫자가 늘어날 뿐 인간으로서 존중받으며 잘 살고 싶다는 사람의 본능은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그럴 것이다.  


삶의 가치가 한 사람의 경제력과 생활력으로 매겨질 수밖에 없어서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는 병자라는 것이 삶의 가치를 폄하하는 요소라면 차라리, 죽음의 가치를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나는 엄마가 떠나지 않기를 바란 것이 아니다. 편안히 떠나기를 바란 것이다. 편안히 존엄하게 세상을 떠날 ‘죽음의 가치’는 연령 불문 이 세상 모두가 누려야 할 권리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요양원에서 지내던 늙고 병든 한 명의 노인의 죽음이라도 한 끝의 억울함이라도 있어서는 안 되는 거다. ‘죽을 날을 바라보고 있던 나이 든 노인.’ 그런 단순한 표현으로 가벼이 평가받을 그런 인생을, 엄마는 살지 않았다. 엄마는 정말 열심히, 인생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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