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누군가에게는 지옥

독거하지만 독거노인은 아닌, 아버지

by 조유리

어느 날 일이 있어 휴대폰 대리점에 가서 직원의 응대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점잖게 정장을 차려입은 노년의 신사가 신용카드를 손에 들고 매장으로 들어왔다.

"이것 좀 해줘요, 휴대폰 결제."

"아, 네 이쪽 컴퓨터에서 해드릴게요. 저쪽이 지금 고장 이어서요."

나는 아직도 휴대폰 요금을 자동이체가 아닌 매장 결제로 지불하는 경우도 있음을 새삼스럽게 알고 자동이체를 안 해두거나 잘 못하는 노인들이 매달 매장에 와서 결제하려면 참 번거롭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객님, 생년월일과 카드 비밀 번호를 알아야 해요."

"왜, 그냥 카드 긁으면 안 돼?"

"아, 카드 단말기랑 연결된 컴퓨터가 지금 고장이에요. 주민번호와 카드 비밀 번호를 아셔야 이쪽 컴퓨터에서 결제해드릴 수 있어요"

본의 아니게 듣게 된 노인의 생년은 38년이었다. 건장한 풍채와 카랑카랑한 말투로 보아 많아봤자 70대 초반일 거라 추측했건만 우리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다니, 의외였다.

"나 카드 비밀번호 모르는데."

떠오르는 번호 몇 개를 불렀는데도 비밀번호가 맞지 않자 노인은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이 카드를 10년이 넘게 쓰고 매달 이렇게 결제를 하러 오는데 왜 안된다는 거야?"

"어쨌든 지금은 카드 비밀 번호를 모르시면 결제가 안돼요, 어르신!"

"나 원, 참!"

노인은 난감한 듯한 표정으로 매장을 한 번 휘 둘러보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 맞은편에는 또 다른 휴대폰 매장이 있었다. 노인은 직원에게 물었다.

"저 쪽 가게 가면 할 수 있나?

"모르겠어요, 한 번 가보세요."

직원의 응대는 무례하지도, 그렇다고 노인의 곤란에 크게 공감해주며 배려심을 발휘하지도 않는, 딱 직원으로서의 본분만 지키는 정도였다.

"허, 참!"

말끔히 차려입은 정장에 당당한 풍채와는 어울리지 않게 한껏 위축된 노인의 표정.

허탈한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쉰 노인은 무거운 발걸음을 매장 밖으로 옮겼다.





나는 휴대폰을 사용해서 은행 업무를 한지 꽤나 오래되었지만 가끔씩 은행을 방문하면 생경한 진풍경에 신기함마저 든다.

은행에 방문한 손님의 3분의 2가 노인이다. 모바일이나 인터넷 뱅킹이 익숙하지 않아 창구를 방문하지만 대면 업무라고 해서 쉽지만은 않다. 안 그래도 복잡한 은행의 업무 처리 방식은 이미 너무도 디지털화되어 모든 계약서와 상품 설명서를 디지털 패드로 확인한다. 때로 직원은 휴대폰에 은행 앱이 없으면 상품 가입이 어렵다며 앱을 깔아서 본인 인증을 한 다음 다시 방문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도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은 이미 직원과의 면담이 끝난 다음에도 창고로 다시 와서 앱을 깔고 인증하는 방법을 묻는다. 한 번 설명해서 못 알아듣는 노인 손님을 응대하는 직원들은 최대한 친절함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이미 귀찮음과 성가심이 얼굴 곳곳에 묻어 있다.

"저, 이거 잠깐만 봐줘요."

"고객님, 지금 다른 고객님 상담 중이어서요. 다시 번호표 뽑고 오시겠어요?"

가끔 은행 직원들은 본연의 업무 외의 디지털 기기 작동법을 물어보며 하소연하는 노인들 앞에서 난감해한다. 하지만 아마도 그 노인에게는 그런 걸 물어볼 사람이 은행 직원밖에 없을 것이다.




아버지가 평소에 내게 거는 전화 용무의 절반 이상이 이와 비슷한 일이었다. 집 전화로 내게 전화를 하면서 휴대폰이 이상하다고 했다. 거의 대부분은 아버지의 스마트폰 조작이 서툴러서 생긴 문제였다. 가장 흔한 것이 터치의 오류. 아버지는 핸드폰 화면의 아이콘들을 지나치게 세게 눌렀다. 살짝만 건드려도 된다고 반복해서 알려주고, 아버지 집에 갈 때마다 여러 번 연습을 시켰지만 아버지 혼자 남으면 도로아미타불이었다. 아버지가 휴대폰 터치의 강도 조절을 잘 못하면 내 전화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또 다른 대표적인 난관은 ARS 서비스와의 통화였다. 전화 통화를 일단 시작하면 전화기를 귀에 대야 하는데 ARS 서비스는 자꾸 다른 번호를 추가로 누르라고 요구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귀에 갖다 댄 전화기를 다시 내려 쳐다보고는 과연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나는 그런 통화를 하실 때는 일단 휴대폰의 '스피커' 버튼을 눌러서 소리를 크게 만들고, '키패드' 버튼을 눌러서 숫자를 볼 수 있게 한 다음,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면서 누르라는 번호를 누르면 된다고, 그 또한 집에 방문했을 때 여러 번 연습을 시키고 종이에 순서를 적어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다음번에 가면 또다시 같은 질문을 하시기 일쑤였다.




그야말로 디지털 천국이다. 감염병 방역의 일등 공신도 IT 기반 행정력이라 하던데, 파라다이스와도 같은 이런 흐름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기계나 AI를 대체할 인적 자원이 되지 못하는 취준생뿐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노인에게 이런 디지털 세상에서 사는 것은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다. 그만큼 직접적이고 일상적인 불편이다. 뭔가 해보려 하는 것마다 벽에 부딪치고,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고, 가르쳐줘도 이해를 못하겠고, 그런데 나만 모르는 것 같고, 내가 몰라도 세상은 다 돌아가고, 그런 나 자신이 쓸모없게 느껴지고 ….

이제 이만큼 살아왔으면 세상에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갈수록 낯설고 불편하며 재미없어지는 세상을 느끼는 노인은 이런 혼잣말을 입에 담는 횟수가 늘어난다.

"에구, 늙으면 죽어야지."

"세상 살기 너무 어려워서 못 살겠다."

내가 휴대폰 사용법을 가르쳐줘도 이해를 잘 못하던 아버지도 종종, 허탈한 한숨과 함께 그런 말을 내뱉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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