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글 때문이다

by 조유리

읽으면 쓰게 되는 나쁜 버릇

심리학 관련 책이나 감상적인 소설은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금세 책을 내려놓는다. 그런 글이 싫어서가 아니다. 어쩐 일인지 그런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쓰고 싶은 강한 충동에 휩싸이고 어느새 책을 덮고 컴퓨터를 켜기 일쑤다. 이런 습관은 독서량을 늘리려는 내 시도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오늘도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을 읽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컴퓨터를 켜버렸다. '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책의 문장을 보자마자 나는 최근의 우울한 근황을 글로 쓰고 싶어졌다.




목적성 글쓰기의 시작

때로 정규직으로, 때로 프리랜서로 약 15년의 내 커리어는 대부분 잡지 기자라는 직업으로 채워졌다. 2018년, 몇 년 동안 맡아오던 일을 그만둔 후로 고정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 엄마를 떠나보내기 몇 달 전인 2019년 가을쯤부터 본격적으로 기사가 아닌 내 인생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 후로 2년의 시간이 지났다.


엄마와 아버지를 연달아 보낸 시기에 시작한 '내 글'은 극도로 전투적이었다. 엄마가 요양원 부주의로 사망한 일을 세상에 알리는 것만이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이었으니. 지금까지도 그 목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년 동안 내 글은 한결 부드러워지기도 했고 주제가 다양해지기도 했지만 내 글을 알려서 많은 이들이 노인 문제에 공감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노년과 돌봄에 관한 강의를 듣고 독서도 하며 이 분야에 대한 시야를 넓히는 노력을 하면서도 그 목적은 계속 남았다.


뚜렷한 목적과 사명감에 비해, 성과는 거의 없다. 글을 통해 몇 명의 고마운 분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받은 것을 제외하면 주위를 둘러봐도, 뉴스를 봐도 늙어가는 노인에 대한 보살핌과 요양 제도에 대해 관심을 두는 이들은 별로 없다. 모두가 힘든 펜데믹 상황에서는 더욱더. 당장 부모님이 쓰러져 이 문제에 당면한 이들은 있겠지만 그들은 그 돌봄 상황에 매몰되어 제도의 개선에 대해 생각하기 힘들다. 나 또한 엄마가 한창 아플 때는 매일 생기는 일들을 해결하기 바빴으니까.


주제가 문제가 아니라 내 필력이 문제일 거라는 생각을 물론, 먼저 한다. 그건 처음부터 인정했던 내 한계였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고 더 이상의 방법이 뭐가 있을지 지금으로선 알지 못한다.




악플을 견디는 자, 무엇이 될까?

사명과 목적을 잠시 잊고 일상적인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꺼내 든 것이 남편에 대한 것이었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 수시로 튀어나오는 남편의 가부장적인 모습은 가끔이지만 내 신경을 건드렸고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는 부부에게도 성역할 문제는 끝없이 부각되는 고민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글을 몇 편 썼다.


기사를 쓰던 관성 때문일까? 가벼운 일상 에세이로 시작하려던 글은 사례와 자료를 인용하고 근거를 갖추면서 다소 격한 성평등 주장 글이 되어 버렸는데 나는 이 글 몇 편을 브런치가 아닌 다른 글쓰기 플랫폼에 올렸다. 그리고 나중에 발견했다. 그 플랫폼에 채택된 글은 포털 사이트 기사란과 연동된다는 것을.


글을 올린 지 며칠 지나서야 포털에 노출된 내 글을 발견한 나는 눈을 의심했다. 10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려있었다. 경험상, '좋아요'를 누르고 싶은 글에는 그렇게 많은 댓글이 달리지 않는다. 급격히 벌렁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잠재우며 확인한 댓글들은 아니나 다를까, 대부분 악플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무시해도 될 만큼 가벼운 말장난도 있었지만 진정 자신의 일인 양 내 남편을 욕하고, 남편을 지적한 나를 욕하고, 대한민국의 남성을 욕하고, 여성을 욕하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격한 댓글도 많았다. 나는 간신히 몇 페이지를 넘겨 댓글을 확인한 뒤 화면을 닫아버렸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에, 브런치에 썼던 같은 글마저 내려버렸다.


글을 쓰는 일에 자신이 없어졌다. 아니, 어쩌면 나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 자신이 없어진다고 하는 게 더 맞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나 자신 자체에 대해.


이번 악플 사건이 큰 상처가 되긴 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취재를 하고 인터뷰를 한 뒤 그 내용을 정리해서 완성하는 기사에는 '나'가 없어도 되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런 글만 써왔고 이제 내 삶과 생각이 드러나는 글을 써보려는 상황에서 무플 내지 악플만 받은 셈이다. 필력만이 문제라면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내 관심사, 내 취향, 내 생각이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이 곧 나였는데, 그 글에 호응을 얻지 못했으니 내 존재가 문제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글을 통해 호응을 얻으려는 의도 자체가 잘못일 수 있지만, 처음부터 엄마 사건에 호응을 얻으려고 글을 쓰기 시작한 나로서는 '호응이 없어도 100% 나 자신을 위해 쓴다'는 말은 아직은, 솔직하지 못하다. 게다가 남편 관련 글의 경우, 호응은 바라지도 않고, 내 생각을 정리하려 한 번 써봤는데 의도치 않은 비난을 받았다. 무호응에도, 악플에도, 그 무게를 견디며 꾸준히 써내야 결국 뭐라도 될 것인가? 그러기에 내 멘털은 너무도 얇은 유리 조각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는 지금 좀, 코너에 몰렸다.




글은 나에게 구원이 될까

그럼에도 이렇게 또 글을 쓰고 있다. 읽으면 쓰고 싶고, 가족이나 지인과 대화하다가 또 쓰고 싶고, 길을 걷다가도 또 쓰고 싶어진다. 목적성 글쓰기도, 비목적성 글쓰기도 호응을 받지 못하면서, 그래도 쓰고 싶어지는 충동은 어떻게 눌러야 하나.


<자존감 수업>이 제안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나에게는 글쓰기가 그 방법이라고 그동안 믿어왔는데 최근에는 글쓰기를 통해 나 자신이 싫어졌다. 그 싫어진 나 조차도 이렇게 글로 풀어버릴 수밖에 없어서, 그 답답함에, 저어기 부모님이 계신 하늘을 보면서라도 외치고 싶다. "어쩌라고요!!!"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것이 40대 중반의 기혼 여성이 해도 되는 질문인지조차 잘 모르겠다. 왠지 이런 질문은 미혼의 청년들이 해야 할 것 같다. 40대 중반은 그냥, 오늘 끼니는 뭘로 할지, 어떻게 아이들 공부시킬지, 어떻게 노후 자금을 준비해야 할지 등에 대한 고민을 해야만 할 것 같다. '자신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 자체로 '배부르구나?' '한가하구나?'라는 핀잔을 들을 것 같다. 그럼에도 왜 나에게는 이 질문이 이토록 절박한 걸까.


충동을 못 이겨 쓰는 글이야 계속 쓰게 되겠지만 글이 나의 구원이 될 거라는 희망은 지금으로선 퇴색되었다. 부모님 일이 생긴 직후엔 억울함과 비통함에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열정이라도 있었지, 나 자신에 대한 좌절감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최고다. 다 글 때문이다. 아니, 다 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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