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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N잡러 Sep 17. 2020

내레이터모델 일로 배운 '잘 팔리는' 마케팅

하루 매출 1000만원을 찍어보았습니다.

‘일 매출 1000만원에 기여했습니다’

대학시절 제출했던 모든 자기소개서는 이 문장으로 시작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토리였는지 각종 학생기자와 서포터즈에 지원하는 족족 뽑혔다. 면접이 있는 경우 질문은 뻔했다. “1000만원 매출에 기여했다고 했는데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나요?” 질문을 듣는 즉시 머릿속에서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이번 면접도 통과다. 이제 서서히 낚싯대를 들어올리기만 하면 되겠구먼. 


이 에피소드가 궁금하다면 끝까지 읽어 보길 바란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며 기다린 자에게 복이 있나니.


나는 수능 다음날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첫 아르바이트는 페레로로쉐 초콜릿 판매였다. 누군가 펑크 내어 급하게 대타를 구하는 거라서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하고 갔더니 아뿔싸 내레이터모델을 구하는 거였다. 편의점 바깥에서 내 키와 비슷한 거대한 페레로로쉐 조형물 옆에 섰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 ‘페레로로쉐 초콜릿 사세요’


장장 7시간 동안 한자리에 서서 초콜릿을 사라고 외쳤다. 지나가던 행인1은 내게 성냥팔이 소녀 같다며 페레로로쉐를 사갔다. 행인2는 페레로로쉐도 사고 편의점에서 따뜻한 음료를 사서 손에 쥐어주고 갔다. 마시지 말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도록 들고 있으라고 덧붙이면서. 그날 컨셉은 내가 봐도 영락없는 성냥팔이 소녀였고, 판매 전략은 아마도 동정과 연민이었으리라.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일이지만 이 일은 적성에 꽤 잘 맞았다. 두세 달 정도 하니 멘트 실력도 많이 늘었다. 행사장에서 내레이션을 하다 보면 업체 담당자가 너무 잘한다며 경력이 오래되었는지 묻곤 했다. 고정적으로 일해줄 수 있냐는 제안도 꽤 많이 받았다. 내 입은 미다스의 입인지 홍보만 했다 하면 그 제품이 완판되는 일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대전 은행동에 있는 더페이스샵으로 일하러 갔다. 중고등학생이 지나갈 때면 1+1 틴트 행사를 소개하고, 젊은 여성이 지나가면 오늘이 할인행사 마감일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던 중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일본에서 한국 BB크림이 유행이라는 말이 떠올라 얼른 BB크림을 집어 들었다. “비비크림~ 디스카운트~”


일본인이 내 앞에 멈춰 서자 잽싸게 BB크림을 손등에 콩알만큼 짜고 연신 두드렸다. 촉촉함을 강조하고 싶었다. 일본인은 ‘아리가토’라고 말하며 매장 안으로 들어가자 힘차게 응답했다. “이랏샤이마세” 그날 점장님은 보너스 십만 원을 주셨다. 그 일본인이 BB크림 수십 박스를 주문해서 일 매출 천만 원이 넘는다며. 이로써 점장님은 수익을, 나는 자기소개서 소재를 얻었다. 굿. 


나는 던킨도너츠 회사에서도 예쁨 받았다. 도너츠 10개에 만 원인 일명 ‘만원팩’을 홍보하고 직접 판매까지 하는 일이었다. 근무시간은 5시간이었지만 3시간 만에 테이블 가득 쌓여 있던 만원팩을 모두 팔아서 일찍 퇴근하곤 했다. 소속 기획사에서는 판매를 잘 하는 비결을 물었지만 웃기만 했다. 던킨도너츠를 다 팔면 일찍 퇴근할 수 있어서 열심히 판매한 거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대학시절 어학연수도 안 가고 자격증도 안 따고 회사 인턴도 하지 않자, 친구들은 ‘스펙’이 되는일을 해야 하지 않느냐며 조언했다. 지금은 취직 생각이 없더라도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하라고 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이력서 한 줄 한 줄을 차곡차곡 채우는 동안 나는 버스표를 차곡차곡 모아뒀다. 하루는 강릉, 하루는 부산. 전국 방방곡곡으로 일하러 가면서 기념으로 챙겨온 것들이다.


마케터로 일하면서 업체들의 공식블로그나 상세페이지를 대행하다 보면, ‘잘 팔리는 글쓰기’를 잘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뭐 딱히 글쓰기 전략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느낌대로 쓸 뿐인데 자꾸 이런 말을 들자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째서일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이거다, 내레이터모델. 이 일이 이력서를 채우는 한 줄이 되진 못해도 8년 경력이면 경험치 만렙은 되지 않을까.


빨리 판매하고 일찍 퇴근하고 싶어서 고객 맞춤형으로 하던 멘트. 할인행사 중에는 남은 기한을 언급해서 고객에게 다급한 마음이 들게 하던 멘트. 홍보할 제품의 세부사항만 말하기 보다 브랜드에 어떤 철학이 있는지도 설명하던 멘트. 마케팅이론을 배운 적도 마케팅회사에 다닌 적도 없지만, 내레이터모델로 참여한 수많은 행사가 결국 마케팅이었다. 고로 나는 경력 8년차 마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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