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언론고시반. 기자가 될 때까지 절대 나오지 않겠다던 다짐은 2년 만에 꺾였다. 매일 아침 8시에 출석체크를 하기 위해, 머리만 겨우 감고 뚝뚝 물기가 떨어지는 상태로 전속력으로 달렸던 나날들. 한 달에 한 번 가졌던 회식에서 새벽 4-5시까지 부어라 마셔라 먹어 놓곤, 몇 시간 뒤인 오전 8시에 전원 출석한 걸 보며 서로 독하다고 혀를 내둘렀던 추억들. 대학교 수업보다 몇 곱절이나 많은 걸 배운 이곳을 내 발로 걸어 나오다니. 2년간 켜켜이 쌓인 살림살이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옮기면서도 그만두는 게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내 마음과 달리 다 치운 내 자리는 너무도 깨끗했다. 원래 내 자리가 아니었던 것처럼. 허한 마음에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돌아섰다.
언론고시반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글을 꽤 잘 쓰는 줄 알았다. 면접에서도 ‘나는 글을 잘 쓴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곳의 지원 조건은 평점 3.0 이상, 토익점수 800점 이상이었지만, 평점 2.4에 토익점수도 없던 나는 그 ‘당당함’ 때문에 뽑혔다. 그 후 몇 달간 매일 부족함을 깨닫는 게 일상이었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구나, 겸손해졌다. 내 맘대로 끄적이던 글은 선배들의 첨삭 덕분에 정돈되었다. 소설만 읽던 나는 의무적으로 여러 분야의 책을 읽어야 했고 머릿속도 채울 수 있었다. 이곳에 들어와서 더 바빠졌지만 오히려 학점은 all A에 가까워졌다. 대학을 다녔다기 보다 언론고시반을 다녔다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이곳은 소중하고 고마운 곳이었다.
다만, 나는 많이 아팠다. 이곳에서의 배움이 너무도 소중했지만, 최소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 30분까지 있어야 하는 그 생활은 나를 옭아맸다. 한 달에 4번, 새벽 4시에 신문배급소를 들러 신문들을 받아와선 종일 읽고 정리하여 스터디물을 만들어야 할 때는 부담감 때문에 전날부터 잠을 못 잤다. 점점 병가를 쓰는 날이 많아졌다. 가끔은 한의원, 피부과, 내과까지. 하루에 세 곳의 병원을 들러야 했다. 갖가지 증상들이 나타났음에도 병명은 없었다. 스트레스라고만 했다. 배움은 즐겁고 뛰어난 선배님들 사이에서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건 감격스러웠으나, 내 몸은 NO를 외쳤다. 결국 아토피로 온몸이 가려워 밤새 잠들 수 없게 되자 언론고시반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곳을 나온 지 2주가 지나자 더 이상 아픈 곳이 없었다. 밤에도 잘 잤다. 이 사실은 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님들과 함께 하고, 배움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가면서도 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사실 난 언론고시반에 더 오래 있고 싶었는데, 이 생각 자체도 내 본심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내 마음을 깨달은 건 한참 지나서였다. 커뮤니티를 통해 스터디원을 구해 언론고시 스터디를 하고 좋아하는 카페에서 논술 작문을 하면서 진짜 내가 원했던 건 이런 하루구나, 깨달았다. 나는 그 무엇보다 ‘자유’가 중요한 사람이구나. 매일같이 쏟아지는 과제와 날 선 첨삭에 긴장해 있느라 그동안 몰랐나 보다.
나는 나름 성실한 편이라 맡은 일은 꽤 열심히 한다. 열심히 한다는 말보다 잘 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이다. 하루에 10시간을 일하라고 하면 10시간을 일하고, 20시간을 일하라고 하면 20시간도 일할 수 있다. 하지만 일하는 장소와 시간은 내가 컨트롤하고 싶다. 나의 생산성이 높아지는 곳은 한 쪽 다리를 책상에 턱하니 올리고 일해도 되는 편안한 장소이거나 최소한 향긋한 커피향이 솔솔 나는 카페여야 한다. 가끔은 여행지에서의 카페라면 더 좋겠다. 왜 이렇게 생겨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일하는 건 정말 쥐약이니까. 지금도 여전히 자유를 꿈꾼다. 그런데 또 일은 많이 하고 싶다. ‘저에게 업무 장소와 시간의 선택권만 주세요. 그럼 열과 성을 다하여 마감시간에 맞춰 멋들어진 결과물을 드릴게요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