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이 멈춘 곳에서 시작하는 양자 중첩

자연의 일관성에 관한 사유

by 아트라멘텀

이중 슬릿 실험과 슈뢰딩거의 고양이.


설명을 들을 때는 고개가 끄덕여지다가도, 막상 누군가에게 설명하려 하면 말이 꼬이곤 하는 주제이다. 그 꼬임의 중심에는 중첩이 있다. 입자가 한 점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위치에 걸쳐 있다는 말은 우리의 직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 글은 물리학자들 사이의 해석 논쟁에 의견을 보태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중첩이라는 개념이 낯설거나 헷갈리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덜 낯설게 느낄 수 있는 하나의 그림을 제안하려 한다.


출발점은 이 질문이다.

당신이 자연을 설계한다면, 어떤 규칙을 세우겠는가?


구조가 다르면 결과도 다르다


서울에서 제대로 된 전통 음식을 맛보고 싶다면 광장시장이나 종로 일대로 향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오래된 식당이 밀집한 곳에서 그런 집을 만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어디에 무엇이 더 많이 모여 있는가, 구조의 비대칭이 결과를 좌우한다는 직관이다. 이 직관을 단순한 형태로 옮겨 보자.


두 길로 나누는 장치


이동 로봇 30대가 있다. 갈 수 있는 곳은 장소 A와 장소 B뿐이다. 출발 전 모든 로봇은 각 장소에 갈 가중치를 설정하는 장치를 통과한다고 가정하자. 이 장치가 각 로봇에 'A로 2/3, B로 1/3'이라는 동일한 가중치를 설정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참고로 물리 실험에서는 빔스플리터라는 장치가 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 빛의 알갱이인 광자를 빔스플리터에 통과시키는 방법을 통해, 투과와 반사라는 두 경로에 대해 각각의 가중치를 의도에 따라 설정할 수 있다.


30대를 통과시키면 각 로봇은 설정된 가중치에 의해 약 20대가 A로, 10대가 B로 간다. 3대를 통과시키면 높은 가능성으로 2대가 A로, 1대가 B로 간다.


그렇다면 한 대만 보내면 어떻게 되는가?


A 또는 B 어느 한 장소에서만 발견된다. 로봇이 한 대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정말 당연하기만 한 결과인가? 가중치 설정 장치가 만든 2대 1 구조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왜 남아 있어야 하는가? 반대로, 로봇이 출발 전부터 A로 정해져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가중치 설정 장치는 이 로봇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런데 30대를 보냈을 때는 설정에 따라 약 20대가 A에 도착한다. 같은 장치가 30대일 때는 결과를 좌우하면서 1대일 때는 아무 효과도 없다면, 그것은 일관된 규칙이 아니다.


자연을 일관되게 설계한다면, 장치의 효과는 대수와 무관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한 대를 보낼 때도 그 구조는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어야 한다.


깜깜한 경로


장치를 통과한 로봇이 완전히 차폐된 경로를 지난다고 하자. 이동 중에는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아무 정보도 외부로 나오지 않는다. 로봇은 경로의 끝에서 A 또는 B에 도착한다.


이 깜깜한 구간 동안, 장치가 만든 2대 1 구조는 여전히 살아 있는가? 도착 결과만으로는 알 수 없다. 30대를 보내든 1대를 보내든, A와 B에 약 2대 1로 도착한다는 사실은 똑같기 때문이다. 로봇이라면 장치를 통과하는 순간 행선지가 배정된 것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그러나 입자의 세계에서는, 도착 결과 말고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실험이 있다.


이중 슬릿이 답한다


전자총으로 전자를 하나씩, 충분한 시간 간격을 두고 쏜다. 전방에 놓인 판에 두 개의 나란한 슬릿(가느다란 틈)이 있고, 그 너머에 스크린이 있다. 전자가 스크린에 닿으면 점이 하나 찍힌다. 직관적으로는 각 전자가 두 슬릿 중 하나를 지나갈 테니, 점들이 쌓이면 슬릿 두 개에 대응하는 두 줄의 띠가 나타날 것이라 예상한다. 그러나 점이 충분히 쌓이면, 두 줄이 아닌 밝고 어두운 띠가 여러 겹 교차하는 간섭무늬가 나타난다. 분명히 전자를 하나씩, 충분한 시간 간격을 두고 쐈는데 말이다.


이중 슬릿은 두 경로에 동일한 가중치를 주는 장치다. 만약 전자가 슬릿을 지나는 순간 한쪽으로 이미 정해졌다면, 각 전자는 한 슬릿만 지난다. 스크린에는 왼쪽을 통과한 분포와 오른쪽을 통과한 분포를 더한 두 줄의 띠만 나타나야 한다. 간섭할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간섭무늬가 나타난다. 두 경로의 가능성이 "깜깜한" 구간 동안 함께 살아 있었고, 스크린의 각 지점에서 서로 강화하거나 상쇄했기 때문이다. 각 전자가 두 슬릿을 동시에 지나면서 자기 자신과 간섭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슬릿 근처에 기록 장치를 달아 어느 슬릿을 통과하는지 알 수 있게 하면, 이 "깜깜한" 구간이 환하게 밝아진 셈이 된다. 전자가 어느 쪽을 지나는지에 관한 정보가 "외부"로 새어 나간다. 그 순간, 전자가 실제로 지나간 경로 하나만 남고 나머지 가능성은 사라진다. 간섭무늬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이 그 기록을 확인하든 하지 않든 이미 그렇다.


이것이 자연의 답이다. 가중치 설정 장치가 만든 구조는 출발 순간에 확정되는 배정이 아니다. 정보가 외부로 새어 나가기 전까지 가능성들이 함께 살아 있으며, 서로 간섭하는 상태다.


지금까지 '가능성들이 함께 살아 있으며 서로 간섭하는 상태'라고 풀어 말한 것이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중첩이다. 그리고 각 가능성의 가중치를 하나의 수학적 표현으로 담아 놓은 것을 파동함수라 부른다.


파동함수가 실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예측을 위한 수단으로만 보아야 하는지는 학계에서 여전히 논의 중이지만, 반도체 설계에서 화학반응 예측에 이르기까지 현대 기술의 근간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관측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보의 새어 나감이다


구조가 하나로 확정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이 물음은 양자역학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 헤맨 문제다. 폰 노이만 같은 천재조차 관측의 최종 주체로 인간의 의식을 고려했고, 수십 년이 지난 1970년에야 디터 제(H. Dieter Zeh)가 결정적 실마리를 제시했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측'의 본질은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입자와 주변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에 있다는 것이다.


관측이란 어느 경로를 택했는지에 관한 정보가 외부로 새어 나가는 사건이다. 예를 들어 전자가 공기 분자와 충돌하면, 공기 분자는 튕겨 나간다. 그 튕겨 나간 방향과 속도에 전자가 어디에 있었는지가 흔적으로 남는다. 환경에 흔적이 새겨지는 것, 그것이 정보가 외부로 새어 나간다는 뜻이다. 이것은 측정이 입자를 건드려서 원래 있던 값을 망가뜨린다는 뜻이 아니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던 구조가 환경과 엮이면서 하나로 확정되는 것이다. 흔적이 조금만 새겨져도 구조는 빠르게 흐릿해지지만, 완전히 새겨지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일상 환경에서는 이런 충돌이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수조 번도 넘게 끝나고 남을 만큼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 언제나 이미 확정된 상태에 있다. 중첩이 존재했던 흔적을 만날 일 자체가 없다.


이 경계에 도달하기까지 물리학은 수십 년을 헤맸다. '사람이 확인할 때'를 기준으로 잡으면 사람이 없는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미정인 채로 남는다. '어떤 임의의 순간'으로 잡으면 그 순간을 결정하는 규칙이 또 필요하다. 정보가 외부로 나갔는가, 아직 나가지 않았는가. 그것이 유일하게 모순 없는 '관측'의 경계다.


상자 속 고양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슈뢰딩거가 이 사고 실험을 제안한 것은 중첩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중첩을 거시 세계로 끌어올리면 이렇게 터무니없는 결론에 이른다고 지적하려 했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중첩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으니 역설적이다.


상자 안에 고양이와 장치가 있다. 방사성 원자 하나가 붕괴하면 센서가 감지해 망치를 작동시키고, 망치가 청산가리 병을 깨뜨려 고양이는 죽는다. 붕괴하지 않으면 고양이는 산다. 붕괴할 확률이 50%라면 상자를 열기 전, 고양이는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방사성 원자는 붕괴와 미붕괴라는 두 가능성에 가중치가 걸린 채 준비되어 있다. 원자의 상태에 관한 정보가 아직 외부로 새어 나가기 전이라면, 이 구조는 살아 있다. 아직 고양이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 고양이는 살아 있다.


결정적인 것은 원자의 붕괴 여부가 센서에 전달되는 순간이다. 그 정보는 망치, 유리병, 공기 분자, 장치 전체를 거쳐 상자 안의 환경과 엮인다. 깜깜했던 곳에 빛이 켜지는 것과 같다. 구조는 하나로 확정된다. 붕괴와 미붕괴 중 한쪽만 현실이 되고, 나머지 가능성은 사라진다. 붕괴했다면 망치가 작동하고 청산가리 병이 깨진다. 붕괴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고양이의 생사는 사실상 붕괴 여부가 센서에 전달되는 순간 결정된다. 고양이가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자를 여는 것은 이미 결정된 상태를 뒤늦게 확인하는 일이다.


지구 위의 모래알 전체 개수보다 약 1억 배 많은 원자로 이루어진 고양이라는 거시 물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기 분자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쉬지 않고 정보를 환경으로 흘린다. 거시 세계에서 중첩이 유지될 틈은 없다.


자연이 일관되게 지키는 것


이제 우리는 자연이 그토록 고집스럽게 지켜온 일관된 설계도를 마주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정보와 실재에 관한 두 가지 원리다.


- 중첩: 입자의 위치나 상태에 대한 가중치 구조는 정보가 외부로 새어 나가기 전까지 살아 있다. 이 고요한 중첩 안에서 가능성들은 서로 간섭하며 하나의 구조를 이룬다.

- 관측: 정보가 외부로 새어 나가는 순간, 그 구조 전체가 하나로 확정된다. 하나의 입자가 갖는 여러 가능성 중 단 하나의 실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중첩이 기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연의 설계가 이상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주변과 상호작용하지 않는, 즉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는 '완벽한 고요'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뿐이다. 양자 세계는 그 고요가 실재하는 세계다.


하지만 그 세계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서로 다른 규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중첩과 관측은 이중 슬릿을 지나는 전자 하나에도, 상자 속 고양이에도, 그리고 양자컴퓨터의 큐비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세계는 단 한 번도 일관성을 저버린 적이 없다. 우리가 그것을 낯설게 느끼는 것은, 이 거대한 규칙의 한쪽 면을 일상에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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