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한다는 것, 납득한다는 것

직관이 닿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는 질문

by 아트라멘텀

양자 중첩이라는 개념을 접한 세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중첩이라는 게 있다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이중 슬릿은 왜 나오고, 전자가 자신과 간섭한다는 건 또 뭐야."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전자를 하나씩 이중 슬릿에 쏘았는데, 한 입자가 동시에 두 슬릿을 지나면서 자기 자신과 간섭한다고?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이게 말이 돼?"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문제를 풀었더니 답이 딱 맞네. 시험도 잘 봤어. 교수님이 계산에 집중하라고 했으니까 나는 이해한 거겠지."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세 번째는 이해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세 사람은 같은 축 위의 서로 다른 곳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곳에 서 있다.


첫 번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두 번째 사람은 알아들었지만 받아들이지 못했다. 세 번째 사람은 계산은 할 수 있지만, 그 계산이 자연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이 이해한 것은 아니다


세 번째 사람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수식을 풀 줄 안다는 것은 가치 있는 능력이다. 그 수학적 체계가 현대 기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수식이 맞다는 것과 그 수식이 기술하는 세계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같지 않다. 현상이 왜 그래야 하는지, 그것이 자연의 어떤 규칙에서 비롯되는지를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연을 다루는 법은 알되 자연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모르는 셈이다.


과학 기술은 끊임없이 새로운 응용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것이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를 판단하려면, 수식을 풀 줄 아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 기술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해'라는 단어가 사람마다 다른 뜻으로 쓰이는 한, 우리는 같은 말을 하면서 다른 곳을 보게 된다.


납득


어떤 현상이 왜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따져 보다 보면, 직관에는 여전히 어긋나더라도 '이렇게 보면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모른다고도 말할 수 없는 수용. 나는 이것을 납득이라 부르고 싶다.


납득은 직관적 이해와 다르다. 직관적 이해는 일상의 경험과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는 앎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과 기술에는 일상의 경험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영역이 많다. 그렇다고 이해를 포기하거나 수식 뒤에 숨을 필요는 없다. 직관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따져 본 뒤에 도달하는 수용. 그것이 납득이다.


70년 전, 같은 고민을 한 철학자


1953년, 뮌헨에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기술의 본질에 대해 강연했다. 1977년에 "기술에 대한 질문(The Question Concerning Technology)"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술의 본질은 결코 기술적인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기술을 도구나 수단으로 보는 것은 '옳은(correct)' 정의이지만 아직 '참된(true)' 정의는 아니다. 옳은 것에 머물면 기술의 본질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계산 결과가 옳다고 해서 그것이 기술하는 세계의 본질을 아는 것은 아니라는, 앞서 내가 품었던 의문과 같은 구조다.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에 깊은 우려를 표했다. 현대 기술은 자연에서 에너지를 뽑아내고, 저장하고, 필요할 때 꺼내 쓴다. 자연은 점점 '쓸 수 있는 자원'으로만 여겨진다. 자원으로만 여기다 보면, 자연을 더 효율적으로 쓰는 법만 묻게 되고, "왜 자연이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은 자리를 잃는다. 기술이 자연을 오직 쓸모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자연이 들려주는 다른 이야기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같은 무대에 선 물리학자


하이데거와 같은 강연 시리즈에서, 양자역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도 발표했다. 그는 현대 물리학이 자연을 더 이상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그려낼 수 없게 되었음을 인정했다.


하이데거는 하이젠베르크의 이 발표를 나중에 자신의 글에서 직접 인용하며 이렇게 분석했다. 현대 물리학이 자연을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 파악하는 일을 점점 더 포기하고 있지만, 한 가지만은 끝내 놓지 못하고 있다. 자연을 계산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정보의 체계로 다루는 것이다.


이 분석이 가리키는 바는 선명하다. 양자역학이 직관적 그림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은 자연을 '계산 가능한 정보'로 환원하는 것만은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양자역학 분야에는 이 태도를 요약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닥치고 계산하라(shut up and calculate)." 현상이 이해가 안 된다 말하지 말고, 수식이 맞으면 된다는 뜻이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위험을 보았다. 자연을 오직 계산 가능한 자원으로만 다루면, "왜 자연이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가"를 묻는 질문 자체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는 가능성도 말한다. 기술의 본질을 똑바로 마주하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끊임없이 물을 때, 가려졌던 것이 다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질문이야말로 사유의 경건함이다


하이데거는 이 글을 한 문장으로 마쳤다.


"질문이야말로 사유의 경건함이다."


질문한다는 것은 인간의 얄팍한 직관을 내려놓고, 현상이 스스로 말하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다. 답을 서두르지 않고, 이미 주어진 결과에 안주하지 않고, 그 결과 너머에 있는 세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끝까지 따져 보는 일이다. 하이데거는 그것이 기술 시대를 사는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자세라고 보았다.


그런데 과학 기술의 개념을 소개하는 고마운 자료들을 보면, 이 사유의 문을 열기도 전에 벽부터 세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이런 말은 겸손처럼 들리지만, 결과적으로 묻기를 포기하게 만든다. 질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어차피 안 된다"는 체념을 심는다. 하이데거가 경계한 것이 바로 이 체념이다.


직관에 맞지 않는 개념 앞에서 포기하거나 이미 주어진 결론 뒤에 숨는 대신, 그 개념이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끈질기게 묻는 것.


그 물음이 납득에라도 이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