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 긴장이 내 무릎 연골에 미치는 영향

위기를 만든 사람은 늘 가장 먼저 화를 낸다

by 근노보

요즘 나의 출근길은 지독하게 건강하다.


무서운 기름값 덕분에

자차 대신 '계단 오르기가 최고의 유산소'라며

억지 대중교통 출근 중이니까.

지구 반대편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감이 내 무릎 연골의 비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걸 새삼 실감한다.


거대 국제 정세와 비루한 내 통장의 상관관계도 놀랍지만,

더 경이로운 건 한 리더의 뻔뻔함이다.

본인이 불씨를 지펴놓고는, 해협이 막히자 동맹국들에게 군함을 보내라며 '겁쟁이들'이라 비난을 퍼붓는 보법.


우리 민족은 전래동화를 통해 유사 사건을 배운 바 있다.

놀부 |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려 놓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못난 사람.


문제를 만든 주체가 오히려 큰소리치는 장면에서 나는 짙은 기시감을 느낀다.


오랜만에 A상무 이야기다.



최근 업무 관련 규정이 신설되었다.

기존에 하던 일에 작은 자료 하나가 추가된 정도.

제출 기한은 넉넉했고, 나는 업계 1위 기업의 사례를 '벤치마크' 삼아 효율적으로 처리할 계획이었다.

상식을 따르는 것이 리스크를 줄이는 기본이니까.


그런데 A 상무가 갑자기 나타나 멀쩡한 제비 다리를 '또옥-' 분질러버렸다.


이거 왜 미리 준비 안 했어?

나는 잠깐 멈칫했다.

아직 아무도 시작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큰일 났네. 내가 수습할게.”


그는 내 보고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혼자 폭주하며 대형 로펌 세 곳에 긴급 검토를 의뢰했다.

사회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외부 전문가 '고견'이 여러 개 붙으면 그건 사실상 결론이다.


멀쩡한 상황을 '회사 영업 정지 위기'로 둔갑시켜 부서장님께 보고했고,

나는 졸지에 세상 중요한 규정을 놓친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 밤샘 야근을 하며 경위서에 가까운 보고서를 써야 했다.

왜 이런 상황이 생겼는지와 재발 방지 대책을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그 이후 결과는?

업계 1위는 내 예상과 정확히 일치하게 조용하고 담담히 처리했다.


우리 역시, 가만히 있었다면 아무 문제없었을 해프닝이었다.




다리를 고쳐준(척한) 놀부에게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 주듯,

A 상무는 이 소동을 본인의 '선제적 대응' 성과로 포장하고 싶었을 게다.

그래서였을까.


“자문 비용이 꽤 나왔어. 내가 너희 리스크 막아준 거니, 우리와 너희 부서에서 나눠서 처리하자.”


없는 문제를 있다고 한 것도,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불필요한 일을 만든 것도 본인이면서

이제 와서 우리와 비용을 나누자니.


기백이 멋지다.

본인이 멋대로 다리를 부러뜨려 놓고 빨간 약 발라준 비용까지 내놓으라는 저 당당함.



상상력이 부족한 나지만, 퇴근 지하철에서 상상을 해본다.


그가 기어이 받아낸 수임료 박 속에서 험악한 도깨비들이 튀어나오는 장면.

그 도깨비들이 방망이 대신

그가 낭비한 우리들의 '업무 효율 훼방 보고서'를 들이밀었으면 좋겠다.

새벽 4시 메일에 잠 설친 다크서클을 복리로 계산하고,

폰트 두께에 갉아먹힌 우리네 자존심을 시가로 환산해 이자를 청구하는 블랙코미디.


앗. 어느새 하차역이다.

비록 현실의 도깨비는 없지만,

수임료 청구서는 여전히 내 메일함에 자리 잡고 있다.

결자(結者)는 그였으나 해지(解之) 비용은 우리의 몫이다.


오늘도 나는 주유소 앞을 지날 때보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지하철 계단을 오른다.

그나마 다행인 건,

A상무 덕분에 화가 날수록 내 업무 스트레스 근육은

'종이 호랑이'가 아닌 '백두산 호랑이'처럼 단단해진다는 사실이다.

화를 운동으로 승화하는 이 지독하게 건강하고 슬픈 생존법.


그의 꿈에서라도

작은 도깨비가 그에게 말해주길 바라본다.


“다음부턴 그냥… 가만히 있어라 좀.”


부디

권선징악이 살아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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