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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케메케 May 10. 2016

센과 치히로, 그리고 나의 행방불명

내 마음속에 나의 진짜 이름

10여 년 만에 다시 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처음 봤을 때의 느낌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이야기로 와 닿았다. 물론 '신들의 목욕탕'이라거나, 요괴, 마법의 존재가 현실에 있을법한 일은 아니지만, 보다 현실은 그런 마법 같은 이야기로도 설명이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보다 직설적으로, 신과 마법이라는 색채를 통해 애니메이션이라는 화폭에 담은 듯했달까.




왜 가오나시였을까


사실 가오나시라는 존재는 이야기 전체를 끌고 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생뚱맞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왜 가오나시인가? 각종 신이 모이는 장소여서 트러블메이커로 움직일 수 있는 인물들은 가오나시 말고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을 텐데? 가오나시는 왜 말을 못 하나? 금을 만들어낸 이유는 뭐였고 왜 지독하게 치히로를 쫓아다녔는가?


나는 여기서 가오나시가 인간 본성을 상징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목소리도 얼굴도 없이 그저 하나의 영혼처럼 떠다니는 가오나시는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은 순수한 인간 영혼 그 자체를 이야기한 것이고, 욕망의 화신으로써 모든 것을 먹어치운 뒤 탐욕스러워진 가오나시는 세속적인 삶에 길들여진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금을 만들어내도, 아무리 모든 이의 관심을 받아도 가오나시는 만족하지 못한 채로 더 많은 것을 원할 뿐이었다. 그의 배는 만족을 모르고 끝없이 차오르지 않았던가?


가오나시가 삼킨것은 가오나시 자신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그러나 그 끝없는 욕망이 결코 가오나시의 외로움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은 치히로에게서 거부당한 이후로 확연하게 보인다. 모두가 좋아하던 금을 치히로는 거부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보면 정말 작은 소녀인 치히로 한 명에게 거부당했다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아마 우리들도 아무리 외부에서 욕망을 채워도 쉽게 무너지게 된다는 점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마음은 안에서 채우지 못한다면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밖에서 채우는 것은 허망할 뿐이다.



욕망을 토해내는 가오나시


이런 가오나시도 쓴 경단을 먹은 후 모든 것을 뱉어내고 만다. 그런데 그 과정이 흥미롭다. 독한 오물들을 뱉어내는 가오나시는 굉장히 괴로워하며 치히로를 원망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욕심으로 비롯된 소유물, 각종 허영적인 것들을 씻어내는 것에 괴로워하고 허탈함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는 그저 잠시 우리의 손을 들렀다가 떠날 운명인 재물에 모든 것을 걸고 그것이 늘면 즐거워하고 줄면 괴로워한다. 외부적 요건일 뿐인데 재물이 마치 자기 자신인 마냥 느끼는 것이다. 가오나시가 먹은 것들을 토해내는 괴로움은, 우리가 가진 것을 잃어가는 괴로움과 일치한다.


원래대로 돌아온 가오나시


끝까지 모든 것을 뱉어내고, 가장 처음 삼켰던 개구리 요괴마저 뱉어낸 가오나시는 결국 목소리, 즉 성격마저 다시 잃어버린다. 아니 애초에 자신의 목소리도 아니었다(정확히는 개구리 요괴의 목소리였다). 세속적인 것들을 잠시 흡수해서 그 목소리가 자신의 본래 모습인 마냥 사용했던 것뿐이다. 그렇게 욕망으로 더럽혀졌던 마음이 원형만 남게 되었다. 즉 고립감과 외로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이다. 더 이상 치히로를 원망하지도 않고 그저 따라다닌다. 자신이 뱉어낸 것을 더 이상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가진 것들(재물과 명예 등등)을 모두 잃어버리면 가오나시와 같은 모습일까? 모든 것을 비워낸 가오나시는 오히려 과도하게 소심해하며 이 세상 모든 것을 두렵게 바라보았다.



유바바의 목욕탕, 나의 이름을 잃어버리는 곳



치히로는 유바바의 목욕탕을 떠나가며 따라오는 가오나시를 보며 이야기한다. "목욕탕에 있어서 저렇게 된 것 같아." 나도 문득 그 에 동감하게 되었다. 목욕탕은 세속적인 세상을 상징한다. 금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재물 이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는 곳이 그곳 아니던가. 그곳에서 가오나시는 자신의 본성을 망각하고 욕망에 침식되어갔던 것이다.


굳이 가오나시가 아니더라도 목욕탕의 다른 모든 종업원들도 마찬가지다. 하쿠를 포함하여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요괴들은 본인의 이름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나의 본성'을 망각한 채로, 세속에 물들어 본질을 잃었다는 점을 상징한다. 항상 그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하지만 본성(진짜 이름)을 잃어버렸기에 그들은 자유를 잃었다. 이는 수많은 종교의 가르침인, 인간 본성을 되찾아야 깨달음을 얻고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얻는다는 이야기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보였다.




센과 치히로, 그리고 나의 행방불명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영화를 보고 있는 수많은 '나'들의 행방불명을 이야기한다. '나'는 왜 자아를 가졌는가.' 나'는 왜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분노하고, 두려워하고, 수치스러워하는가? 그것이 진짜 나의 모습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가오나시를 보며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욕망은 내가 아니다." 가오나시의 뱃속에 가득 찬 음식들(재물)은 나의 일부인가? 가오나시가 얻은 목소리(성격)는 나의 본질인가? 둘 다 아니다. 영혼은 그저 그러한 것들이 담기는 그릇에 불과하다. 가오나시가 욕망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좀 더 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분명히 제니바의 집으로 간 가오나시는 그렇게 탐욕스럽게 무언가를 집어삼키지 않았고, 위협적인 존재도 아니었다. 욕망은 결코 가오나시의 본질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


집착을 비워내면 그 끝에서 행방불명된 나를 찾아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유바바의 성을 떠날 수 있었던 사람은 딱 두 명, 치히로와 하쿠였다. 이점이 무엇을 시사하는가? 사랑의 가치를 이야기해준다. 둘은 서로 사랑하고 아꼈기에 세속을 이겨내고 진짜 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오직 서로 사랑하는 것만이 우리를 욕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준다. 우리도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린 세속의 삶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의 가치를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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