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K-POP이 되다] #2_전세계가 강남 스타일

H.O.T.부터 BTS까지 K-POP 성장기 #2_YG엔터테인먼트X싸이

by 에틱 유니버스


#2 전세계가 강남스타일_YG엔터테인먼트X싸이


2000년대 중반 동방신기, 원더걸스, 소녀시대. 빅뱅, 2PM, 카라를 필두로 하는 2세대 아이돌의 시대가 열렸다. 보아의 성공을 기반으로 한 SM 엔터테인먼트의 일본시장 개척은 일종의 영토확장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한국활동과 함께 일본활동을 병행하는 시스템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단연 SM엔터테인먼트였다. 보아의 성공을 발판 삼아 보아와 동일한 전략으로 동방신기를 일본에 데뷔시켰다. 강력한 현지화 전략에 따라 동방신기는 일본에서 신인이 되어 처음부터 한 발 한 발 올라가는 전략을 취했는데 이번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소녀시대, 빅뱅, 카라, 2PM 등이 일본 진출에 열을 올렸다.


소녀시대 일본 후지 TV 토쿠다네 출연모습


카라의 미스터가 일본에서 대박이 났다고?

그런데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DSP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카라(KARA)였다. 심지어 카라는 현지화 전략을 사용하지 않고 한국 활동곡 미스터에 일어가사를 붙인 것이었음에도 그 반응이 매우 뜨거웠다. 심지어 카라의 일본인기는 한국의 인기를 뛰어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된다. 이후 일본 가수도 서기 힘들어 꿈의 무대라 불리는 도쿄돔 공연까지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최정상 아이돌에 우뚝 섰음을 알리게 된다. 이외에도 제트코스터 러브(Jet Coaster Love), Go Go Summer! 등 다양한 히트곡을 발표하였는데 이 곡들은 모두 한국 작곡팀인 스윗튠(루팡, 미스터 등 작곡)에 의해 발표되었다. 다시 말해 일본에 K-POP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 여성가수 중 최초로 도쿄돔 콘서트를 개최한 카라


일본 진출 성공의 달콤함은 잠시였을 뿐..

동방신기와 카라 모두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인해 인기 최정상에서 브레이크가 걸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동방신기는 군복무 기간을 제외한 13년의 계약기간 등 불공정 계약으로 인한 계약 해지 이슈가 있었고, 카라는 DSP 엔터테인먼트의 미숙한 업무처리로 인한 일본활동 계약이 계약 해지의 원인이었다. DSP 엔터테인먼트는 카라가 일본에서 대성공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지 못하고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일본진출을 강행했다. 심지어 일본 매니지먼트와의 계약조건은 일본활동에서 발생하는 모든 매출(음반, 광고, 공연 등)의 절반 이상을 일본 매니지먼트의 가져가며 제작비와 프로모션비는 DSP 엔터테인먼트가 부담하는 구조라 카라가 일본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마이너스 정산서를 받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도쿄돔에서 매진공연을 개최하는 상황임에도 오히려 수익이 마이너스인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을 것이다. 이후 갈등이 봉합되긴 하였으나 멤버교체 등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카라는 동방신기와 마찬가지로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들의 갈등은 K-POP 시장의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동방신기의 경우 SM과의 전속 계약 분쟁의 결과 불공정 계약이 개선되고 7년을 기준으로 하는 표준계약의 형태가 구축되어 소속사와 아티스트가 상생하며 지속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또한 카라는 일본에서 현지화 전략 없이 K-POP 자체로의 일본 활동 성공의 가능성을 보여주게 되었으며 철저한 계획에 따른 진출의 중요성을 보여주게 되었다.

전 세계 음악시장 1위, 미국이 남았다!

2009년 JYP의 대표 박진영은 원더걸스의 3 연작 텔미-소핫-노바디 성공에 자신감을 얻고 미국시장 진출을 선언한다. 콘셉트와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노바디(Nobody)를 선택한 것은 카라와 같은 방식이었으나 바닥부터 시작하는 방식은 보아와 동방신기의 전략과 동일했다. 아동복 코너에 원더걸스의 싱글을 밀어 넣어 빌보드차트 76위에 진입하는 등 나름의 성과를 보이기는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만다. 원더걸스 외에도 보아, 세븐 등이 미국시장의 문을 두드렸으나 역시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빌보드차트 Hot100 76위에 진입한 원더걸스


예상치 못한 순간 터졌다!
강남스타일

2012년 7월 전세계를 뒤흔든 곡이 탄생하게 되는데 바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한국에서 발매되었고 활동무대 역시 한국이었으나 3주 만에 빌보드차트 2위를 기록하는 진기록을 선보인다. 이러한 성공이 가능했던 배경은 바로 유튜브였다. 2012년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인해 레거시 미디어의 지배력이 감소하던 시기였고 이로 인해 지구반대편의 뮤직비디오가 동시에 세계인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덕분에 강남스타일은 전체 가사의 90% 이상이 한국어임에도 세계인에게 가사 그대로 불리며 사랑받았다. 여기에 미국에서 유학생활까지 한 싸이는 영어에 능통했고 미국의 각종 쇼프로그램과 시상식 등의 프로모션 활동에 박차를 가하며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마돈나와 강남스타일을 부르는 모습까지 볼 수 있을 줄이야...
아티스트의 독립성을 존중한
YG 엔터테인먼트의 시스템

싸이는 2010년 YG와 손을 잡았고 불과 2년 만에 대성공을 거뒀다. 이는 YG의 레이블 시스템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YG는 2010년 싸이에 이어 2011년에는 에픽하이를 영입하였고 이들에게 독립적인 환경에서 음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에픽하이의 경우에도 하이그라운드(HIGH GROUND)라는 독자적 레이블을 통해 자유로운 음악활동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이는 YG 소속 뮤지션인 악뮤(AKMU)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YG는 프로모션 등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 영역에서는 적극 서포트하되 음악적 부분에선 아티스트의 독립성을 철저하게 존중하는 일종의 레이블 형태의 시스템을 추구한다. 이것은 싸이가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는 음악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강남스타일이 탄생하는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성공이 지속되지 못한 것은 아쉬워

싸이는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역사에 획을 긋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열기를 지속하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물론 강남스타일 이후 발표한 젠틀맨이 빌보드차트 5위, 행오버 26위 등 적지 않은 성과를 보였으나 강남스타일의 성공을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아쉬운 평가를 받았다. 이후 싸이는 이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국내활동에 집중하며 흠뻑쇼라는 브랜드 공연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등 여전히 정상의 자리에 있지만 강남스타일처럼 전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티스트의 반열에는 오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남스타일의 전 세계적 히트는 K-POP의 한 단계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그동안 아시아에서만 통한다고 여겨졌던 K-POP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음악이라는 것을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통해 세계인이 확인한 것이다. 이것은 정말 큰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후 등장한 BTS의 성공이 바로 싸이의 강남스타일 성공과도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K-POP의 성장에 가장 큰 자양분이었다는데도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YG엔터테인먼트가 싸이의 성공을 넘어서는 영광을 가져다준 블랙핑크가 탄생하는데도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3에서는 BTS와 블랙핑크로 이어지는 K-POP의 전성기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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