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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십 Nov 16. 2020

버티고 버텨서 버티고개

우리가 어릴 적 꿈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 같다.


위인전 읽기도 바빴던 나이. 당연히 자기 계발서에 단골로 나오는 ‘인생의 보물지도를 만들어라’, ‘생생하게 꿈을 꾸며 적어라.” 등의 내용을 알 리 없었다.


그럼에도 종이에 장래희망을 적어 벽에 붙여 놓고 매일 밤마다 그걸 보며 기도했었다. 변호사라고 적었던 게 기억난다. 막연하게 억울한 사람을 구해주는 정의의 용사로 변호사를 택했던 것 같다.


꿈을 이루지 못하는 어른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되고 싶으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도무지 어떤 이유로 어릴  꿈에서 멀어지는지 상상조차 어려웠다. 주위 친구들을 둘러봐도 어릴 적 꿈 그대로 의사가, 디자이너가, 판사가 다 될 것만 같았다.


Photo by Judy Beck/unsplash.com


어릴 적 하늘색 꿈은 이렇게 변해가고


그러다 어느덧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견월지명.
달은  보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달렸다. 꿈을 꾸고 좋아하는 일을 찾고 지켜나가기보다 당장 코 앞에 닥친 모의고사 성적이 더 중요했다. 꿈을 보지 못하는 시간이 그렇게 점점 늘어만 갔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는 꿈과 현실을 끊임없이 비교질 하기 시작했다. 내 성적과 내 역량에 과연 꾸어도 되는 꿈인지. 가능할지 어림없을지 주위의 빈축이나 살지.


꿈을 제대로 마주하기보다  마음 한 구석에 구겨 놓았다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도록. 그러다 가끔은 스스로 만든 울타리 사이즈에 맞는 그럴듯해 보이는 꿈을 말하기도 했다.


적당히.. 가 최고의 미덕 아닌가요


학과보다는 성적에 맞추어 갔던 대학, 12년 공부했으니 노는 건 그동안의 나를 위한 보상이자 권리라 생각했다. 마치 이제 내 할 일은 전부 끝난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드는 술자리는 쉬웠고 즐거웠으며 나의 현실을 마주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잊힌 13살 소녀의 꿈.



그렇지만 그대로 좋았다.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준비해 들어간 회사.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위에서 하란대로만 하면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

Photo by Long Truong/unsplash.com


어느새 꿈은 누구나 마음으로만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 대상일 뿐. 꿈을 이룬 사람은 그야말로 로또 당첨자 같은 기적의 인물일 거라고. 권선징악, 해피엔딩 같은 고리타분한 소설 속 이야기 일뿐이라고.

20대에는 나처럼 사는 게 정답인 것 같기도 했다. 알아서 몸 사리고 적당히 타협하고. 선생님이 되기 위해 3년째 고시 준비하는 동생보다는 내 처지가 나아 보였으니까. 멀쩡히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일 한다며 유학 떠나는 친구보다는 안정적이었으니까.


버티고 버텨서 이룬 그들의 꿈

그러나 어느새 내 동생은 어엿한 선생님이 되어 본인의 꿈을 이뤘고 유학 갔던 친구는 공부 마치고 돌아와 교수님이 되었다.


달콤한 월급에 중독되었던 나는 여전히 그대로 회사원이었던 반면, 젊은 날의 안락함 대신 꿈을 선택한 그들은 잠깐은 고생스럽고 유난스러워 보였지만 어릴 적부터 지켜온 그 꿈을 끝내는 이루었다.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왜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 꿈을 이루지 못하는지. 회사 연차가 쌓여갈수록 아쉬움과 함께 더욱 짙어만 가는 깨달음,


강한 자가 버티는 게 아니라
버티는 자가 강한 것이다.


열 세 살의 소녀가 이해할 수 없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버티지 못하고 포기해서다. 어떠한 시련이 와도 잃어버리지 않을 열정과 간절함으로 그 꿈을 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쉽게 포기하고 더 쉽게 타협했다.


시험 점수에 일희일비할 때도 꿈을 바라보고 달렸다면 시험은 단지 하나의 과정일 수 있었을 텐데 그게 다인 줄, 최종 결과인 줄 알고 거기에 맞춰 내 꿈 사이즈를 줄였다가 늘였다가.

꿈이 간절했다면 오래 걸리더라도 돌아가더라도 목적지는 거기였어야 했는데 샛길로 빠져 맛 본 편안함에 그냥 그곳에 드러누워버렸다.

꿈이 간절했다면 믿었어야 했는데. 1년 차에 안되고 2년 차에도 안되더라도 3년 차엔 될 거라 믿었어야 했는데 포기하면 쉬우니까. 언제든 손 떼는 건 쉬우니까.

Photo by Brendan Steeves/unsplah.com


신입사원 시절, 회의실 테이블로 매일 출근하는 한 팀장님이 있었다.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으나 버티고 계신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항상 만면에 웃음을 띠며 출근했기에 궁지에 몰렸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이상하긴 했다. 이미 전략팀장님이 있는데 그 옆 회의실로 전 팀장이 출근하는 게. 출근해서도 하루 종일 신문만 보고 있는 게.

당연히 많이들 뒤에서 수군거렸다. 신입사원인 나조차도 그분의 말씀을 흘려들었을 정도였으니. 그렇게 3개월 전략팀에서의 인턴 업무를 마치고 새롭게 팀 배정받아 일하고 있던 어느 날, 그분이 구사일생으로 다시 현업에 복귀하셨다는 소식이 들렸다.


몇 년 후에는 임원 자리까지 오르셨다. 사람 인생 알 수 없다는 말은 그분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분의 장기였던 버티기. 사실 말이 쉽지 귀가 없었겠나, 눈이 없었겠나.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인고의 세월을 버티고 버텨 결국엔 최고 자리에까지 오른 그분을 존경한다.


나라면 알량한 자존심에 진작 때려치웠을 텐데 무엇이 그분을 그렇게까지 버티게 했을까.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잘은 모르지만 임원이라는 꿈이 언젠간 이뤄질 거라는 믿음이 그분을 버티게 해주지 않았을까. 아 물론 먹여 살려야 할 가정과 고 3 딸이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겠지만.

어떨   무어가를  하지 않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꿈에 다가갈  있다. 편하고 빠른 길 두고 괜히 에둘러 가는 것 같아 보여도 인생은 마라톤. 언제 어디서 기적 같은 스퍼트를 낼 수 있을지 모른다.


버티고 버티자. 버티고 버텨 버티고개를 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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