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부모님 댁이 이사를 했다. 그러자 그동안 어딘가에 처박혀있었던 앨범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단연 우리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아빠의 학창 시절 흑백 사진.
아빠는 태어날 때부터 진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인 줄 알았건만 사진 속 아빠는 장난기 가득한 영락없는 까불이 소년이었다.
교복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있거나 친구들과 나무 위에 올라가 포즈를 취하던 아빠는 뽀얀 피부에 귀엽게 생긴 편이었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아빠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때의 아빠는 나를 몰랐겠구나 싶어 괜히 싱숭생숭했다. 또 내 아이가 내게 그런 것처럼 할머니에게 이 시절의 아빠는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을까 싶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지자 고향에서 수 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우리 집에서 말년을 보내셨다.
하루 종일 굳게 닫혀 있던 할머니의 방. 퇴근하는 아빠의 문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방문을 열고 고개만 밖으로 내밀고 앉은 채로 말씀하셨다.
이야, 우리 집 대통령 오싯다.
퍼뜩 인사해라.
하이라이트는 가족 모두가 한 데 모인 저녁 식사 시간. 할머니는 손녀딸들 앞에 놓인 맛있는 반찬을 모두 끌어다 아빠 앞에 놓느라 정신없다. 눈치도 없이 고기만 골라 먹는 손녀딸들을 흘겨보던 눈은 맛있게 드시는 아빠를 보고서야 길게 활처럼 휘어졌다.
그러나 그런 할머니를 보고 아빠는 늘 불같이 화를 냈다. 가만히 애들 먹게 좀 두시라고. 하지만 할머니도 지지 않았다. 싫다는 아들 입에 꾸역꾸역 쌈을 싸서 들이미셨다. 그럼 또 그걸 거칠게 밀어내던 아빠.
평소 부드럽고 조용한 아빠가 그런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니 놀라웠다. 또 한편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먹으면 되지 굳이 저렇게까지 큰 소리를 낼 일이었을까. 아빠가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할머니가 사랑한 건 아들만이 아니었다.
아빠의 고향은 경상북도 의성. 당시 엄마에게 명절 증후군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린 나는 있었다. 명절만 되면 그렇게 시골 가기가 싫었다. 우리 가족 빼곤 모두 대구에 살던 친척들. 오고 가는 대구 말속에서 은근한 소외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싫었던 건 할머니의 감출 수 없었던 손자 사랑. 그중에서도 큰아버지 아들, 맏손자가 도착하면 맨발로 마당을 뛰어나가 얼싸안곤 했다.
아이고, 우리 광현이 왔나!
아직도 할머니의 그 음성이 귀에 선하다. 그런 할머니에게 늦둥이 막냇동생 마저 딸이라는 건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돌아가실 때까지 아들 없는 우리 아빠를 가여워하던 할머니였다.
막냇동생이 태어났을 때는 내가 11살 되던 해 봄이었다. 4월 5일 식목일에 제왕절개로 힘들게 태어난 10살 터울 막냇동생. 딸 둘에 또 딸이었다.
셋째 딸은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고 했던가. 내 동생이지만 참 예뻤다. 걸음마 시작할 무렵부턴 일부러 친구들 있는 놀이터에 동생을 데리고 가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다.
원래도 우리 집에 잘 오시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동생을 보러 한 번도 올라오시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이미 다녀가셨다고.
도착하자마자 막냇동생 기저귀부터 갈았다고 한다. 딸이라고 들었으면서도 뭐가 아쉬웠는지 다시 한번 본인 눈으로 확인하시고 그 길로 다시 내려가셨다고 했다.
인생은 아이러니.
그런 할머니의 마지막을 가장 오래 함께 한 건 막냇동생이었다. 할머니 장례식에서 눈물을 보이던 손주도 그 아이가 유일했다.
반면 할머니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손자는 재작년 우리 가족 각각에게 전화해 비밀로 해달라며 돈을 빌려 간 후론 연락이 없다.
이제는 닳고 닳아 진부해진
귀남이와 후남이 아들과 딸 이야기.
엄마와 아빠는 요즘도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막내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냐고. 그렇게 우여곡절 태어난 우리 집 막내는 서른 살에도 아직도 자기가 귀여운 줄 안다.
짜식, 아무것도 모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