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곳은 입구에 강이 흐르고 뒤로는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열 가구 남짓이 사는, 가게 하나 없는 진짜 시골 마을. 대부분 그렇겠지만 시골에는 여기저기 샛길이 참 많다.
고향집으로 돌아와서 가장 많이 한 일은 산책이었고 동네 모든 길은 나의 산책로가 되어 주었다. 사계절 내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가 뜨나 거의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산책을 했다.
겨울의 산책은 황량했고 바람이 자주 불었지만, 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아침에 한번 오후에 한 번은 꼭 산책을 했다. 운동의 목적도 있었지만 풍경을 감상하는 것에도 의미가 있었다. 겨울의 풍경은 다른 계절보다 휑하고 볼 것이 없었지만 그 휑함 속의 고요한 운치가 있어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었다.
그러다 눈이 오면 산책은 더 즐거워졌다. 황량한 겨울 안에도 눈이 내리면 희한하게 모든 것들이 포근하게만 보였다. 눈이 온 날에는 녹기 전에 발자국을 남기러 부지런히 쏘다녔다. 새하얗게 반짝이는 눈 위로 내 발자국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을 보자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어릴 때처럼 눈이 오면 포대자루를 가지고 놀 언덕도 꽁꽁 언 강 위를 신나게 달릴 썰매도 없어 아쉬웠지만,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들을 같이 했던 친구들이 그리워졌다.
동네에는 어려서부터 한 번도 올라가 보지 않았던 뒷산이 하나 있었다. 부모님은 산공기가 더 신선하고 좋은 거 아니겠냐며 한 번 가보라고 했다. 올라가 보니 산은 등산을 할 만큼 다듬어져 있지 않아 말 그대로 '산' 그 자체였다. 길이 세, 네 군데로 나뉘었는데 내리막길, 소나무가 많은 평평한 숲, '산' 옆으로 난 원만하게 걷기 좋은 짧은 오솔길까지 있었다.
첫날 탐험하듯 산을 둘러보고 내려오며 산책할 곳이 한 군데 더 생긴 것에 기분까지 좋았다. 그곳은 시작이었고 뒷산처럼 산책 장소는 하나둘씩 늘어났다. 수집을 하듯 동네의 모든 길들을 둘러보며 몰랐던 장소를 하나 둘 알게 되었고, 그곳을 찾을 때마다의 즐거움은 생각보다 컸다. 산책을 하는 사람도 나뿐이라 좋았다. 늘 같은 장소지만 간혹 예상하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게 되어 그 재미도 제법 쏠쏠했다.
어느 날은 눈이 온 뒤 뒷산에서 토끼들이 신나게 뛰어다닌 흔적을 발견했다. "토끼들도 눈 위에 제일 먼저 발자국 남기는 걸 좋아하겠지. 발자국 크기가 다른 걸 보니 여러 마리가 있었고 작은 것은 아기 토끼구나."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발자국들을 보며 만화의 한 장면처럼 토끼들을 상상했다. 아무도 없는 겨울날 산속에서 토끼가 깡충거리며 신나게 뛰어다녔단 사실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겨울 길을 걸으면서 좋았던 건 봄을 기다린다는 설렘이었다. 봄이 오면 또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따스한 봄날의 산책길은 상상만으로도 포근했다. 그래서 봄을 기다리며 걸었던 길을 걷고 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