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마지막주 회고
[배스킨라빈스 불이 꺼지면]
1. 스터디카페를 나왔을 때, 맞은편의 배스킨라빈스 가게 불이 꺼진 것을 보고 나서야 밤이 깊었음을 알게 된다. 오늘 하루가 거의 저물었음을, 그래서 일과로서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이제는 귀가할 시간이라는 것을.
2. 지연시킨 출근과 당긴 퇴근으로 회사와 일상의 경계를 다시 그린 이번 주는 시계가 아닌 주위의 감각으로 시간을 느꼈다. 타이머가 울린 9시 정각에 가방을 들고 외투만 걸쳐 출근했다. 고요하던 사무실에서 동시다발적인 기립에 도시락을 꺼냈다. 신입 직원의 '내일 뵙겠습니다' 인사가 들리면 신발을 갈아 신었다. 그리고, 눈이 무거워서 차가운 물에 손을 적시러 스터디카페를 나섰을 때, 맞은편 상가를 마지막까지 환히 비추던 배스킨라빈스 불이 꺼져있는 걸 보면 양가적 감정이 들었다. 벌써 하루가 끝난 야속함과 고된 하루를 견딘 안도감.
3. 일상으로 전환의 의식을 수행할 공간으로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며 저울질했다. 조금 더 정적인 순간이 많은, 그래서 활자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는 지하철을 택했다. 아직은 그 길내내 음악만 채워졌지만.
4. 지연시킨 출근으로 많은 것을 포기했다. 사무실 청소해 주시는 분에게 드리는 아침 인사도, 쿠팡배달로 온 스낵바 물품을 차리는 것, 두 번째로 출근하는 직원과의 담소. 하지만 좋아진 것도 있다. 동료 모두에게 아침인사를 한 번에 할 수 있다.
5. 당긴 퇴근으로 (퇴근 시간 맞을 때) 퇴근길 담소, 8시 이후 공짜 저녁을 포기했다. 그래서 책임님이 염려의 톡을 보내실 정도로 직원들과 거의 한마디도 안 한다. 그렇게 애써 얻은 건 3.5시간.
[3.5 시간]
직장을 병행하면서 공무원이나 전문직 시험 합격한 사람들, 또는 그만한 수준으로 다른 분야에서 성과를 내는 사람들 대부분이 퇴근 후 3-4시간을 꾸준히 투자한 것을 보고, 3.5 시간을 채우자 결심했다.
1일 차 - 실패 - 너무 빨리 귀가했다. 좀 더 할걸
2일 차 - 실패 - 중간에 출출함을 해결하러 먹은 저녁거리는 단순했는데, 그러면서 잠깐만 해야지 켰던 블록게임 30분 레이스로 45분이 지났다. 즉시 지웠다.
3일 차 - 실패 - 10분 정도 쉬어야지 했던 2번 모두 조금만 더를 너그럽게 봐주다가 25분, 사실상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4일 차 - 성공 - 그냥 하면 당연히 나올 줄 알았던 3.5시간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자정을 안 넘기려면 집중 지속시간이 길어야 했다. 휴식은 필요한 만큼만.
> 이제는 밀도를 채울 결심 <
[시계공처럼]
1. 평일 6시간을 채우려고, 출근 전에는 100분을 채우려고 한다. 그러려면 일찍 일어날수록 쉬운데, 수면시간을 줄이면 그날 종일 목덜미에서 등골까지 끈적한 실리콘이 흐느적거리는 느낌이 들어 싫었다. 또 유산소 운동 + 샤워 세트를 출근 전 아메리카노처럼 습관 아니 필사적으로 챙긴다.
2. 집-회사-집의 단조로운 하우징 속에 조밀조밀한 루틴들 설계에 공들인다. 이 작업은 길게 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제라도 완성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할 선물이 될 것 같다.
3. 그래서 하루를 코스모스의 문장으로 여는 아침을 포기할까, 아니 오히려 지금의 내게 더 필요한가 갈등한다. 번역된 문장에서도 충분히 받은 감동을 원어 그대로에서도 함께 느끼는 시간, 원서와 코스모스 자체가 지금 내가 설계하는 단조로움에 쓸모없을 수 있다. 그러나 '쓸모없음의 쓸모'에 기대어 계속해보려한다. 연말까지의 완독 그런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디데이가 아니면 쓸데없이 정하지 않기로 한다. 빛사님의 말씀 처럼 일상이 바빠 하루 이틀 더 많이 못 읽을 순 있지만, 영영 마음에서 놓지 않기로 한다. 마음에서 코스모스와 원서읽기에서만의 특별한 유대를 품기로 한다.
[풀어진 대로 늘어진 주말]
1. 토요일은 독서모임이 있었다. 소설과 영화 <노트북>을 보고 모였다. 드디어 보게 된 영화 <노트북>은 결코 9점대 영화가 아니라 생각했다. 소설에 비해서 심리와 서사가 불친절했고, 특히 '사랑영화니까 전쟁장면 잠깐은 대충 만들어도 된다'는 생각이었는지 어떤지 몰라도, 그 역시 9점대 영화가 될 수 없는 여러 이유 중 하나였다.
2. 영화가 나은지 소설이 나은지 팽팽하게 갈린 덕분에 내 감상이 더 풍부해졌다. 현실의 사랑과 운명의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스멀스멀 고개 드는 추억들을 이야기로 꺼내지 않으려고 애써 죽였다. 오직 전날 읽고 본 <노트북>의 기억만 꺼내려고 애썼다. 그 노력은 다행히도 모임이 종료되는 순간 필요 없어졌다.
3. 성수에 온 김에, 지인이 오픈한 레스토랑에 혼밥점심을 갔다. 3번째 지점이어서, 다른 두 곳에 없는 메뉴를 주문했다. 아니나 다를까 음료와 디저트를 서비스로 받았다. 여기 유자 티라미수는 정말 기가 막힌다. 인스타 스토리에 올렸더니, 전에 데리고 와서 맛 보여주었던 이들이 격하게 반응했다.
4. 사장인 지인은 아침커피모임 인연인데, 점원분이 그 모임을 언급하며 아는 체 했다. 나는 처음 뵙는 거 같았는데 점원분은 아니란다. 잘 생각해 보란다. 큰일이다. 나는 남들과 달리 사람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한다. 나이를 먹는 건가, 잠재적인 훈장 같은 그 장점을 잃는 건가 싶었다. 물론 그 점원이 착각했을 가능성을 좀 더 높게 보고 있다.
5. 귀가하고 스터디카페에 직행한 것은 기특했으나 매우 낮은 밀도의 집중력이었다. 그래서 일요일 계획을 빡빡하게 채웠지만 오랜만에 홀로 남은 집에서 넷플릭스와 피자 타임은 참을 수 없었다.
6. 좀이 쑤셔서 독서실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던 것은 익숙한데, 거꾸로 저녁까지 놀다가 좀이 쑤셔서 스터디카페로 향하는 내가 참 묘했다.
[Epilogue]
다음 주 회사 일 그리고 또 나만의 할 일들을 적고 나니 설렌다. 아마 이번 주 힘들었던 만큼 고될 것이다. 그렇다고 고됨을 지난 좋을지 어떨지 모를 미래가 그려진 것도 아니다. 올해 끝에서야 관성을 벗어난 시간들을 보낼 것만으로 설레는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