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적 대금지급시스템으로 체불을 막으려면

상생채권신탁과 상생결제시스템 결합이 낼 수 있는 시너지효과

by 재리건아빠
영국 PBA(Project Bank Account) 제도와 공사대금채권신탁이 주는 시사점


건설공사 현장에서 반복되는 임금체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 다양한 제도를 도입해 왔다. 노무비 직접지급제, 하도급지킴이, 상생결제, 체불e제로 등 전자적 대금지급시스템은 이제 공공공사에서는 사실상 ‘의무 인프라’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설경기 침체와 함께 부도·회생·파산 사례가 늘어나는 현실 속에서 임금체불과 하도급대금 분쟁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왜 이렇게 많은 시스템을 도입했는데도 체불은 반복되는가?”


한국조달연구원 박희택 부연구위원의 「건설공사 대금지급시스템에 관한 영국 등 PBA 운영 사례 고찰」은 이 질문에 대해 비교적 정직한 답을 제시한다. 즉, 문제는 ‘시스템의 부족’이 아니라 ‘법적 구조의 부재’라는 점이다.



1. 전자적 대금지급시스템의 본질적 한계


현재 운영 중인 전자적 대금지급시스템은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 발주자가 공사대금을 수급인 명의 또는 전용 계좌에 입금

• 수급인의 승인 또는 시스템 절차를 통해

• 하수급인, 자재·장비업자, 근로자에게 순차 또는 동시 지급


이는 분명 기존의 관행보다는 투명하고 효율적이다. 그러나 이 시스템들이 임금체불을 ‘법적으로’ 차단하지는 못한다는 점이 문제다.


왜냐하면 이들 계좌는 대부분,

• 수급인 명의 계좌이거나

• 법률상 ‘신탁재산’임이 명시되지 않은 특수계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급인에게 회생·파산 절차가 개시되거나, 공사대금채권 또는 계좌 자체에 가압류가 들어오는 순간, 시스템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즉, “지급할 수 있는 시스템은 있으나, 지급할 수 없는 법적 상황”이 발생한다.


이는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민사집행법·도산법·신탁법과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다.



2. 영국 PBA 제도의 핵심: ‘직접지급’이 아니라 ‘신탁’


영국의 PBA(Project Bank Account)는 흔히 “발주자가 직접 지급하는 제도”로 소개되지만, 이는 절반만 맞는 설명이다. PBA의 본질은 직접지급 방식이 아니라 ‘신탁(Trust)’ 구조에 있다.


PBA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 발주자가 은행과 계약하여 Ring-fence(용도지정) 계좌를 개설

• 해당 계좌는 **신탁증서(Trust Deed)**에 의해 운영

• 계좌의 자금은 수급인의 일반재산과 명확히 분리

• 수탁자(발주자·원도급자)의 승인 없이는 자금 집행 불가

• 수혜자는 원·하도급사 및 근로자 등으로 특정


이러한 구조 하에서는,

PBA에 예치된 자금은 수급인의 채권자에 의한 압류·가압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즉, PBA는 단순히 “누가 대신 송금해 주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금의 소유권과 집행권을 법적으로 분리·격리하는 제도다.



3. 국내 제도와 PBA의 결정적 차이


국내 대금지급시스템과 PBA의 가장 큰 차이는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국내 제도는 ‘계좌’를 관리하고, PBA는 ‘재산권 구조’를 바꾼다.


하도급지킴이, 상생결제 예치계좌, 체불e제로의 e계정은

행정지침이나 약관에 의해 보호될 뿐, 신탁법상 신탁재산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반면 PBA는,

• 신탁법리에 따라

• 신탁재산의 독립성을 전제로

• 강제집행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이 차이 때문에, 국내에서는 여전히 다음과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 공사대금이 지급되어야 함에도

• 법원의 가압류 결정 하나로

• 노무비·하도급대금 지급이 전면 중단


결국 체불은 “의도”가 아니라 법적 구조의 문제로 발생한다.



4. PBA만으로는 부족한 이유: 공사대금채권 가압류 문제


이 글의 중요한 미덕은, PBA 제도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지 않는 데 있다.

저자는 명확히 지적한다.


PBA는 예금(지급된 자금) 보호에는 강하지만,

공사대금청구권 자체의 가압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즉, 발주자가 아직 공사대금을 지급하지 않은 상태에서,

• 수급인의 공사대금청구권이 가압류되면

• PBA 계좌로 자금이 들어오기 전 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이 바로 공사대금채권신탁이다.



5. 공사대금채권신탁 + PBA 결합 모델의 의미


공사대금채권신탁은,

• 수급인이 보유한 공사대금청구권 자체를

• 금융기관에 신탁하여

• 수익자를 하수급인·근로자 등으로 설정하는 구조다.


이 구조를 적용하면,

• 공사대금청구권 단계에서부터 가압류가 차단되고

• 이후 지급 단계에서는 PBA를 통해 자금 집행을 통제할 수 있다.


즉,

• 채권 단계 보호(공사대금채권신탁)와

• 자금 단계 보호(PBA·예금신탁)를 결합한 이중 안전장치가 완성된다.


이는 NH투자증권이 개발한 “상생채권신탁“이 제시한 모델과 정확히 맞닿아 있으며,

단순한 제도 개선을 넘어 건설공사 대금지급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6. 맺음말: 시스템이 아니라 ‘법’을 바꿔야 한다


임금체불 문제는 더 이상 새로운 시스템을 하나 더 만든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누가, 언제, 어떻게 송금하느냐”가 아니라,

“그 돈이 누구의 재산이며,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다.


영국의 PBA 제도와 공사대금채권신탁 논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체불을 막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법적 구조다.


이제는 전자적 대금지급시스템을 넘어,

신탁을 중심으로 한 공사대금 보호 체계를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