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관계의 취합과 소송방향 설정
서울 광화문에서 강남역까지 택시를 타고 간다고 가정해보자. 택시비용을 최대한 절약할 수 있는 방법들은 무엇이 있을까?
첫 번째, 현재 나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후 올바른 방향으로 택시를 타는 것이 좋다. 간혹, 초행길이어서 익숙하지 않은 동네에서 택시를 잡다보면, 아무 생각없이 내 눈앞에 있는 택시를 잡아탈 때가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택시는 내가 가려는 방향과 반대방향에서 대기중이었고, 다시 유턴이나 P턴을 통해 목적지 방향으로 차를 돌리느라 불필요한 미터요금이 소비될 때가 있다. 내가 광화문 삼거리에 서 있다면, 경복궁역 방향으로 택시를 잡아타는 것보다는 횡단보도를 건너서라도 서울시청 방향 내지 안국역 방향으로 가는 택시를 타는 것이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목적지의 정확한 위치를 택시기사에게 알려주되 교통상황에 따라서 나의 하차지점(목적지)을 변경할 수 있는 유연한 의사결정을 하고 빠른 경로에 대하여 중간중간 기사님과 상의할 수 있으면 좋다. 예를 들어, 한남대교를 건너 강남대로를 통해 강남역을 가는 경로 중 신사역에서부터 강남역 사이가 교통체증이 매우 심하다고 가정해보자. 그냥 언젠가는 도착하겠지라는 느긋한 마음가짐으로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택시는 멈춰있어도 (비록 느리지만) 미터기의 말은 달리고 있다. 필요하면, 신사역에서 내려서 지하철로 갈아탈 수도 있고, 버스중앙차로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논현역에 내려 강남역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탈 수도 있다. 택시 안에 30분 동안 갇혀있으면서 5천원의 비용이 더 나올 것을, 지하철이나 버스로 갈아 타서 비용도 줄이고 시간도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간혹, 택시기사가 나보다 해당 지역의 지리를 더 잘 모를때가 있다. 내가 가고자 하는 지역의 지리와 목적지까지의 지름길을 알고 있다면 중간중간 택시기사에게 알려줘서 해당 루트로 가 줄 것을 요청할 수 있다. 단, 빠른 경로에 대하여 택시기사와의 나 사이의 의견충돌이 있을 수 있으니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세 번째, 해당 지역의 지리에 익숙한 베테랑 택시기사를 만나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베테랑이면서 양심적으로 운행하시는 분을 만나는 것이다. 간혹 한국말이 서투르고 지리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일부러 미터기 조작 내지 먼 경로로 돌아가기 등의 비양심적인 방법으로 바가지 요금을 씌우다가 적발된 택시기사들의 뉴스를 접하기도 한다.
듣고나면 사실 너무나 당연하고 특별할 것이 없는 방법들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 방법들이 "그래봐야 택시요금을 줄여주면 얼마나 줄여준다고?"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필자 역시 한국에서 택시를 탈 때, 대부분의 경우 목적지만 얘기한 후, 택시가 조금 돌아가든, 좀 더 막히는 길로 가든 크게 신경 안쓰고 핸드폰하기 바쁘긴 하다. 그런데 그런 차이가 택시요금에서는 몇 백원 내지 몇 천원의 차이를 만드는 것 뿐이지만, 소송(특히 미국소송)에서는 몇 백만원 아니 몇 천만원의 변호사 비용을 줄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지난 글에서 디스커버리 절차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비용이 발생할 수 있는지 이야기 했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비용을 10%만 절약해도 수 천만원을 세이브할 수 있다!
첫 번째, 현재의 분쟁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변호사와 충분한 상의 후 소송을 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서 송무를 하던 당시에도 개인의뢰인이나 중소기업의 경우, 원고일 경우에는 소장, 피고일 경우에는 답변서 등을, 법률전문가의 도움 없이 일단 주변의 경험이 있는 지인이나 소송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타 유사직역의 전문가의 조언만을 듣고 작성하여 제출한 후에 소송이 시작된 지 한참 후에서나 변호사에게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면 대부분은 간단한 소송이라서 변호사가 필요한지도 모르겠고, 변호사를 선임하는 비용도 아깝고 해서라고들 답변하였다. 물론 그 중에는 별 문제 없이 소송이 진행되어 왔던 경우도 있었지만, 일부 사건의 경우에는 소장의 청구취지부터 엉터리로 작성되어 있거나, 답변서에서 불필요한 사실인정을 하여 매우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던 경우도 있었다. 뒤늦게 이를 바로잡고 수정하는데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바로잡아 지기라도 한다면 다행이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미국에서 소송업무를 하다 보니, 여기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의뢰인이 1심 소송을 진행하던 중 기존의 변호사가 사임하고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로펌을 새롭게 대리인으로 선임한 케이스였다. 한국에 있는 의뢰인이 미국에 있는 변호사를 선임하여 소장을 작성하기는 하였는데, 소장 작성 당시에 의뢰인과 변호사 사이에 거의 소통이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보니, 큰 틀에서의 청구취지 자체는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 기재되어 있었지만 소장에 기재된 사실관계들이 잘못되거나 누락된 부분이 많았고, 심지어는 의뢰인의 주장에 상반되는 사실관계 내용이 잘못 기재되어 있기도 했다. 그 이후 의뢰인과 긴 시간 동안 소통을 하다보니, 의뢰인 자체도 본인의 상황이나 사실관계에 대한 정확한 인지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중구난방으로 우리에게 이것저것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장하는 사실관계도 얘기할때마다 조금씩 바뀌거나 전에는 하지 않던 새로운 내용이 갑자기 튀어나온다든가 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수정된 소장(Amended Complaint)을 작성하느라 또 많은 시간을 쓸 수밖에 없었다.
택시를 탄 승객이 본인이 지금 어디서 택시를 탔는지, 어느 방향으로 탔는지도 잘 모른채로 기사와 목적지에 대한 상의도 없이 일단 직진해 주세요, 여기 앞에서 좌회전 해주세요 등의 지시만 내리느라 택시가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하면서 미터기만 불필요하게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차라리 택시는 목적지만 분명히 얘기하면 택시기사가 알아서 경로를 찾으면 되니 처음 탄 방향이 조금 잘못 되었더라도 금방 제자리로 찾아올 수라도 있다. 그러나 소송은 처음에 이상한 방향으로 잘못 시작하게 되면 돌고 돌아야 하는 시간과 비용이 엄청날 수 있다. 변호사에게 나의 모든 현재 상황, 상대방과의 분쟁의 원인과 현재까지의 진행 현황, 원하는 분쟁해결의 방향을 충분히 설명하고 상의를 한 후 소송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만약 소송의 피고라도 역시, 일단 급한대로 아무 방향으로든 방어를 하고 변호사를 찾겠다는 생각보다는, 변호사와 방어전략에 대해 충분히 의견을 공유하고 소송에 대응하는 것이 좋겠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목적지와 방향은 다르다.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출발하더라도 돌고 돌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한 불필요한 시간과 비용의 낭비를 굳이 감수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목적지가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초기에 나의 방향을 잘 잡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 방향을 잡는 것은 변호사만의 역할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택시기사(변호사)는 처음의 출발방향을 잡는 것에 승객(의뢰인)만큼 민감하지 않다. 초반에 조금 돌더라도 목적지에만 무사히 도착하면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돌면서 올라간 미터기 요금은 어차피 승객이 부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소송의 초반부일수록 의뢰인의 정보 전달과 공유가 너무나도 중요한 부분이다. 모든 정보가 공유된 상황에서 변호사와 명확한 방향 설정을 한 후에 소송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사실 법률적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목적지를 알려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더라도 소송의 방향설정에 참여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일은 아니다. 특히 미국소송에서 미국로펌의 변호사들과 영어로 진행해야 한다면 더욱 더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럼 의뢰인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간단하다. 의뢰인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사실관계를 최대한 자세하게 취합 후 정리하고, 이를 최대한 보기 쉽게 서면(매우 중요하다)으로 정리하여 변호사에게 전달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서면은 워드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메일, 엑셀, 파워포인트 등 뭐든 큰 상관은 없다. 의뢰인과 변호사가 같이 상호적으로 계속 수정하고 업데이트를 할 수 있는 어떤 매체든 괜찮을 것 같다. 필자의 경험상, 이메일로 계속 주고받다 보면 그 양이 너무 많아져서 간혹 과거에 받았던 메일의 내용을 놓치는 경우가 있어, 자주 업데이트가 필요하다면 이메일보다는 워드 등을 통해 파일명과 버전을 계속 업데이트 해가면서 정리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간혹 구두로 이야기하면 변호사들이 알아서 정리를 해 줄 것을 기대하는 의뢰인들이 있다. 당사자도 아닌 변호사가 모든 사실관계를 구두로 전달받아서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령 정리를 잘 한다 하더라도, 이미 정리하는 데 들어간 시간조차도 상당한 비용이다.
따라서 사실관계의 취합과 정리만큼은 반드시 의뢰인(회사인 경우에는 법무팀의 사내변호사나 법무팀 직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관련 부서 직원들이 다 같이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이 직접 하는 것이 좋다. 정리는 시간순으로 할 수도 있고, 쟁점별로 할 수도 있고, 대상별(예컨대 피고인 1, 피고인 2, 피고인 3 등)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정리 방식은 담당 변호사와 사전에 상의를 하는 것이 좋다. 정리 방식을 정하였다면 사소한 사실관계라 하더라도 모두 간단간단히 기록해두자. 각 사실관계 별로 증거자료들을 접붙이기(Pairing)까지 해 두면 제일 좋겠지만, 아직 이 단계에서는 모든 증거자료들까지 완벽하게 페어링을 해 둘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변호사가 사실관계 정리표를 쭉 확인해 나가다 보면 필요에 따라 보충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사실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부분은 알아서 읽고 넘어갈 것이다. 그렇게 변호사와 함께 체를 거르고 걸러 핵심적인 사실관계들을 정리를 해 두는 것 자체로 이미 방향설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 글에서는 분쟁해결의 종착점(목적지 또는 하차지점)을 유연하게 변경할 수 있는 자세와 빠른 경로에 대하여 변호사와 어떤 식으로 소통을 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