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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력도시 연구소 Sep 15. 2017

헛간 산업과 양양의 미래

매력도시 매거진 vol.01_양양(6)


캘리포니아 헌팅턴 해변.

이른 아침, 소년이 서핑을 합니다. 서핑과 사랑에 빠진 13살 소년은 매일 해변에 와서 파도에 오릅니다. 헌팅턴 해변은 파도가 좋습니다. 바람이 알맞게 불고 1년 내내 기온이 온화합니다. 아름다운 해변의 길이는 무려 15킬로 미터. 해변을 따라 느긋하게 걷다가, 멋진 파도가 보일 때 바다로 뛰어들기만 하면 됩니다. 헌팅턴 비치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서핑을 하는 소년 서퍼의 이름은 밥 헐리 Bob Hurley. 때는 1960년대 말, 미국 서해안이 서핑 붐으로 들썩거릴 때입니다.


그로부터 30년 후, 밥 헐리는 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핑 용품 회사를 세웁니다. 설립 즉시 세계적인 서핑 의류 및 용품 회사로 성장한 '헐리 Hurely'입니다. 현재, 헐리는 서핑 문화와 라이프 스타일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회사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회사를 설립하고 3년 후인 2002년, 서퍼들을 깜짝 놀라게 한 뉴스가 터집니다. 액티브 스포츠 시장에서 고전하던 나이키가 헐리를 자회사로 매입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매입가는 1억 2천만 달러. 나이키는 밥 헐리를 자회사의 회장으로 임명했습니다.


http://dailyurbanculture.com


이제 소년 서퍼는 예순 살이 넘은 억만장자 아저씨가 되었습니다. 나이키에서 은퇴한 후, 여전히 그는 커다란 로고가 그려져 있는 야구 모자를 쓰고 서핑을 즐깁니다. 자신이 설립한 회사 '헐리 인터내셔널'은 헌팅턴 비치 인근 도시, 코스타 메사 Costa Mesa에 성업 중입니다.

그동안 헌팅턴 비치는 많이 변했습니다. 1년 내내 서퍼와 관광객들로 붐비는 '세계 서핑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해안 도로변에는 러너와 자전거족들이 가득합니다. 도시에는 좋은 레스토랑과 클럽들이 속속 들어섰습니다. 서핑 대회, 비치 발리볼 대회 같은 이벤트가 끊이지 않습니다. 인구도 꾸준히 늘어, 해변의 인근 도시에 20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50년 동안 밥 헐리와 헌팅턴 비치에 일어난 일입니다. 중간 이야기를 많이 건너뛰었는데요. 궁금한 부분이 있습니다. 소년 서퍼 헐리는 어떻게 나이키가 탐을 낸 회사를 만들었을까요?


다시, 헐리가 10대 서퍼였던 시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서핑을 사랑한 소년은 자신의 손으로 서핑 보드를 만들었습니다. 만들었다기보다는 깎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인데요. 재료 덩어리를 테이블 위에 두고 대은 도구를 이용해서 조금씩 깎아가면서 보드의 날씬한 곡면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조각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보드를 만드는 사람을 '쉐이퍼 Shaper'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의 서핑 보드는 대량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모양을 조각해야 하는 물건이었습니다. 만드는 사람의 손의 감각에 따라 품질이 좌우됐겠죠. 헐리는 친구들을 위해 보드를 몇 개 깎아줍니다. 특별한 기술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좋아하는 서프보드에 시간과 정성을 들인 겁니다.


http://brighttradeshow.com


"보드를 깎는 기술을 잘 모르니까, 서프보드의 디자인은 이러해야 한다, 라는 내 주장이 없었어요." 헐리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퍼들을 만나서 보드에 대한 의견을 듣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죠." 개성 강한 서퍼들의 의견을 잘 들어주고, 그들에게 맞춤 제작된 서프보드를 깎는 10대 소년 '쉐이퍼'. 소문은 금세 서퍼들 사이에 퍼졌고, 주문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제작 과정을 반복하면서, 그는 서프보드를 만든다는 것은 '타협'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둥글게 경계부를 만들면 파도가 착 감기고, 날카롭게 만들면 파도를 밀어내고, 밑 부분이 볼록하면 물을 밀어내고, 브이자 모양이면 물이 감긴다는 식으로요. 서핑 보드를 만든다는 것은 이 모든 요소들을 조합하고 타협해서, 깐깐한 서퍼들의 요청에 맞추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부터 하나하나 생산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습니다. 자본금 한 푼 없이 동네 창고에서 서퍼를 위한 맞춤 보드를 깎아주는 헐리에게 딱 맞는 사업이었죠.


이렇게 자신의 회사를 시작한 헐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서프 문화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헌팅턴 해변에 모이는 젊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해변의 자유로움을 즐길 수 있도록 말이죠. 그리고 그는 호주의 독특한 서핑 의류 브랜드 빌라봉 Billabong을 미국으로 들여와 판매합니다. 독특한 길이의 반바지에 젊은이들이 폭발적으로 반응했습니다.


http://www.billabongdestin.com/


잠시 이야기를 돌려서, 서핑 패션을 살펴보겠습니다. 해변의 드레스 코드는 웻수트, 반바지, 샌들, 비키니입니다. 가볍고, 편하고, 단순한 옷입니다. 비교적 만들기 쉬운 물건들입니다. 평평한 고무판에 끈 두 가닥을 끼우면 완성되는 것이 샌들이니까요. 평생 소가죽을 다룬 나이 많은 이탈리아 구두 장인이 필요한 제조업이 아닙니다. 변형도 쉽습니다. 하얀색 티셔츠에 동네 아티스트가 그린 독특한 그래픽을 더하면 뚝딱하고 신제품 하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집에서 손으로 제작하고 동네에서 팔 수 있는 제조업입니다. 이런 것을 코티지 인더스트리 Cottage industry라고 합니다. 집 앞 창고에서도 열 수 있는 제조업, 헛간 산업인 것이죠. 10대 소년도 작은 공간 하나만 있으면 서프보드를 소량 제작해서 팔 수 있습니다.


https://www.vissla.com/


서핑 패션의 또 다른 특징은 서퍼들의 독특한 서브 컬처 Sub-culture 의식입니다. 주류가 인정하는 유행을 거부하고 독특한 아이템을 찾습니다. 무릎 밑으로 내려오는 반바지를 입었다가, 엉덩이가 드러날 정도로 짧은 것을 입었다가, 몸에 바싹 붙기도 하고, 흘러내릴 듯 헐렁하기도 하고, 최신 소재를 찾다가, 레트로 풍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햇빛과 소금물에 색이 바랜 티셔츠가 히트를 하기도 했고, 우스꽝스러운 프린트의 티셔츠를 입고 다니기도 합니다. 취향이 제각각이니, 수많은 소규모 서프 브랜드들이 개성 있는 제품을 내놓습니다. 소비력이 왕성한 젊은 세대는 지치지도 않고 새로운 것에 눈을 돌립니다.

의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핑의 재미에 한번 빠지면, 스케이트 보드, 롱보드, 바디보드, 카이트 보드로 소비가 확장됩니다. 전문가들은 2020년까지 전 세계 서핑 산업이 약 95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합니다. 나이키가 탐낼만한 시장입니다.


다만 한 가지. 서퍼들을 만족시키려면 이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독특한 서프 문화와 라이프 스타일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사업입니다. 서퍼들을 만나고 어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물건이 나옵니다. 해변에 자리 잡은 서퍼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사업입니다. 아마도 나이키 같은 대기업이 고전했던 이유겠죠. 반항기 가득한 서퍼들은 꿈에도 스우시 Swoosh 로고가 달린 웻수트를 입고 서핑을 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대부분의 유명한 서핑 브랜드들은 해변 마을에서, 서퍼의 손에 의해 탄생했습니다.

퀵 실버 Quicksilver는 1970년 호주 빅토리아의 해변에서 서퍼인 앨런 그린이 시작한 회사입니다.  오닐 O'Neil은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서핑 용품을 팔며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합니다. 설립자 잭 오닐 Jack  O'Neil은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서핑을 하며 자랐고, 웻수트를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리프 Reef는 1984년 라 욜라 해변에서 아구에레 형제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멋진 비치 샌들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립컬 Rip Curl은 호주의 토키 해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두 명의 서퍼 친구, 워빅과 싱어가 만나서요.


http://www.complex.com


요약하자면 서핑 관련 제조업은

1) 서퍼들이 만든 사업이고, (아웃사이더 비즈니스)

2) 헛간에서 소규모 제조업으로 출발했고, (소량 다품종에 적합)

3) 해변이 있는 지역 도시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본인들도 일하다가 서핑을 해야 하니까요.)


헐리의 예에서 보듯, 이런 산업이 알맞은 시기와 장소를 만나면 확장력 좋은 지역 산업이 될 수 있습니다. 소비력이 왕성한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아, 지역에 단단히 뿌리박은 제조업이 생깁니다.


http://huntingtonbeachca.gov


헌팅턴의 해변에 좋은 파도가 치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앞바다에 산타 카탈리나라는 섬이 있는데요, 태평양에서 건너오던 파도가 이 섬에 부딪치고 상승효과를 이루면서 해변에 서핑을 하기 좋은 파도를 만든다고 합니다. 적당한 파도, 아름다운 모래, 따뜻한 태양. '인간들아, 여기서 서핑을 해라', 하고 태초에 신이 점지한 해변처럼 보입니다.

그럼, 헌팅턴이 처음부터 서핑의 도시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파도의 힘을 알아본 서퍼들이 있기 전에는 사탕무 밭이 널려져 있는 캘리포니아의 날씨 좋은 농촌에 불과했습니다. 석유가 발견되자 채굴 시설들이 도시에 들어섰고요. 그러다가 경제 공황이 발생하고 석유산업이 쇠퇴하자 이들의 눈에 보인 것이 파도였습니다.

오늘날, 헌팅턴의 애칭은  'Surf city USA'입니다. '미국의 원조 서핑 도시'라는 뜻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아름다운 파도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서핑 용품 제조사 중 하나인 헐리와 퀵실버의 본사가 있는 도시이니까요.


2010년대, 대한민국의 서핑 수도는 양양입니다. 적절한 시대에 맞춰 서핑 문화가 동해안에 상륙했습니다. 서퍼들은 오래된 해수욕장에서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습니다. 젊음은 그 매력에 즉각 반응했습니다.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미래의 양양은 그 매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현재의 매력도시 양양을 뒷받침하는 것은 관광과 서비스 산업입니다. 독특한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 찾아오는 젊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서핑을 강습하고, 햄버거와 맥주를 팔고, 숙소를 제공합니다. 한때의 스키어와 스노보더들처럼, 언제든 새로운 것에 눈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요.


은퇴한 헐리는 아직도 작업실에서 보드를 손으로 깎고 있다고 합니다. 헐리와 헌팅턴의 50년은 지역 기반의 소규모 제조업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일자리를 늘리고, 정착민이 생기고,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서퍼들의 비즈니스 말입니다.


50년 후, 양양은 여전히 매력 도시일까요?

이른 아침, 양양의 파도에 올라 탄 소년이 있다유심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A-City



Reference

밥 헐리 Bob Hurley   +

헐리 Hurley   +

헌팅턴 해변 Huntington Bea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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