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도시 매거진 vol.03_군산 (3)
"월명동 동네 책방, 마리서사 Open"
분필로 글씨를 쓴 입간판 옆에는 귀여운 풀 화분이 놓여 있습니다. 책방이 들어선 곳은 나무로 지은 단층집입니다. 판자를 이어 붙인 벽 위에 파란색 경사 지붕이 얹혀있는데, '어디선가 본 듯?'하는 생각이 드는, 친근하고 소박한 모습입니다.
책방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내부는 작은 공간으로 나뉘어 있고, 구석구석 책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주택으로 쓰이던 집의 내부를 고쳐서, 책이 모인 작은 방들을 만들었습니다. 나뭇결을 자연스럽게 살린 천장과 단정한 조명 덕분에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패션의 완성은 손에 책'이라는 글귀를 새긴 손가방이 벽에 걸려 있고, 은색 주전자와 화병이 서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소소하지만 하나하나 눈길을 끄는 물건들입니다. 이런 곳은 섬세한 손길을 가진 주인이 꼼꼼히 꾸민 공간이 틀림없습니다. 직접 물건을 고르고, 이리저리 놓아보고, 멀리서 실눈을 뜨고 지켜보다가 다가와서 물건들의 위치를 다시 잡아주는 주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진열된 책들도 그랬습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은 책들이 가득했습니다.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책방과 딱 닮은 주인에게 어떤 기준으로 책을 고르냐고 물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읽을 만한 책으로 고른다는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재즈를 잔잔히 틀어두고, 군산의 동네 사람들을 위한 책을 소개하기 위해 오픈한 책방 <마리서사>입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월명동에, 동네 사람들이 읽을만한 책을 골라둔다는 대답이 실은 의외였습니다. 그런데 책을 둘러보니 알겠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위해 책을 고른다는 기준을 세우니까, 오히려 우리처럼 군산에 여행을 온 사람들도 '한번 볼까', 호기심이 생기는 책이 많았습니다. 맨날 책 한 권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실천 못하며 사는 우리가, 한적한 소도시에 여행 온김에 한 권쯤 읽고 싶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골목길 작은 책방에서 동네의 감성을 담은 책을 발견합니다. 좋은 타이밍에 인연을 만나는 것처럼 반가운 일입니다.
일본식 옛날 집들이 남아있는 군산 월명동은 인기 관광지로 거듭났습니다. '타임슬립 time-slip'이 관광 테마입니다. 시간 여행을 떠난 듯, 오래된 기와집, 목욕탕 굴뚝, 버려진 창고가 있는 골목을 산책합니다. 몽실몽실하게 다듬은 나이 많은 향나무가 낡은 담장 너머로 보이고, <군산 뇌의원 腦醫院>이라고 새긴 두툼한 돌 간판을 내걸고 있는 신경정신과 병원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일본풍의 이국적이고 복고적인 볼거리가 월명동 인기의 비결입니다.
오래된 목조 주택들과 반듯반듯 단정한 골목. 이런 동네 구석구석에 숨은 맛집과 카페들이 들어섰으니, 딱 우리가 환호할만한 요소들이 갖춰졌습니다.
새로운 바람을 타고 '핫플레이스'들도 속속 들어섰습니다. 로맨틱풍 인테리어로 내부를 꾸민 카페도 생겼고, 테디베어 뮤지엄이 동네에 크게 한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군산시도 신이 났습니다. 전봇대 없애고 길을 새로 포장하고, 양조장을 이렇게 바꿔보자, 옛날 일본집을 저렇게 살려보자, 온갖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월명동의 눈부신 변신 속에, <마리서사>는 조용하고 담담한 공간을 만들어 자리 잡았습니다. 일본식 옛 집을 개조했는데, 사실 개조했다기보다는 집이 가진 구조를 있는 그대로 잘 활용했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의 전통 가옥은 복도 같은 마루가 방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마치 큰 상자 안에 작은 상자들을 여러 개 넣어 둔 것처럼, 작은 상자(방)의 바깥쪽에는 좁고 긴 공간이 있는 것이죠. 그러니 밖에서 방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방과 바깥의 중간쯤 되는 좁은 복도를 거쳐야 합니다. 마리서사는 이 긴 공간을 활용해서 도로를 따라 길게 책을 진열했습니다. 그러자 골목길을 걷던 사람들도 서점 내부를 잘 볼 수 있게 되었고, 내부로 들어서기 직전 한번 심호흡을 할 수 있는 멋진 공간이 탄생했습니다. 마치 책방을 위해 설계된 듯, 집의 구조와 내용이 딱 들어맞는 집이 되었습니다.
마리서사라는 이름의 의미를 물어보니, 1940년대 시인 박인환이 운영했던 서점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서사 書舍'는 서점이라는 뜻이고, 마리는 프랑스의 예술가 이름이라고 하네요. 아, 시인이 서점을 운영하던 낭만적인 시절이 있었군요.
그런데 박인환의 서점은 단순한 서점은 아니었나 봅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시인과 예술가들이 모여 서로 토론도 하고 말다툼도 하고 어깨동무하고 술을 먹으러 나가는, 일종의 예술인 아지트였습니다. '나 서점 좀 다녀올게' 하고 저녁때쯤 나가서는, 밤늦게 만취로 돌아오는 문인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한마디로 책방을 빙자한 놀러 가기의 스타트 지점입니다. 어디서 만날까? 야, 일단 마리서사에서 봐. 그리고 책방에 하나 둘 모여 즐거운 모임을 길게 이어갔겠죠.
모임의 출발점. 도시의 책방은 원래 이런 힘을 감추고 있는 것 아닐까요?
마음에 드는 책방에 한번 들어서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가 늦게 오면 화가 나지만, 책방이라면 오히려 다행입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시간이 술술 흐릅니다. 이웃 사람들과 우연히 스쳐갈 확률도 높아지겠죠.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비슷한 부류의 책 근처에 모이고, 이야기가 시작되고, 교류가 일어납니다.
여행객들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지역에 관한 정보를 한눈에 파악하기 딱 좋은 곳이 그 도시의 책방입니다. 서점에서 군산의 장소, 역사,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정해온 여행 계획을 수정하기도 합니다. 서점은 여행의 출발점이기도 한 것이죠.
동네 사람들의 커뮤니티 시설이자, 여행객의 출발점인 동네 책방. 이런 미덕을 가진 동네 책방이 들어섰다면, 그 지역은 매력 동네가, 매력 도시가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미덕 넘치는 동네 책방을 아무나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책을 좋아하고 책을 잘 아는, 소수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책을 가까이 해왔습니다. 많이 봤고, 많이 샀고,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많이 했을 겁니다. 만들고 펴내는 일을 해본 사람들도 있습니다. 책과 함께 삶을 보내며, 이들은 책을 고르는 분명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작은 책방은 그 자체로 편집숍입니다. 세상 모든 책을 가져다 둘 수 없으니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들여올 책과 제외해야 할 책을 모으고 엮어줘야 합니다. 대형서점, 인터넷, 어디서나 살 수 있는 것이 요즘의 책이지만, 관점이 뚜렷한 책방 주인의 편집술術을 보러 우리는 작은 책방에 찾아갑니다.
그러니 책방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주인의 관점을 파는 가게다 보니, 주인과 가게의 이미지가 똑같아야 하는 것이 동네 책방입니다. 귀여운 주인이 귀여운 책방을 열어야 하고, 진지한 주인은 진지한 책방을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억지로 꾸미면 들킵니다. 작은 풀 화분, 좋은 문구를 새긴 손가방. 작은 소품 하나하나에 주인의 취향을 실어 신호를 내보내고, 이 신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방에 모입니다. 시인이 책방을 내면 시인들이 모이게 마련입니다.
동네 책방은
매력 도시의 중요한 지표생물
동네 책방은 매력 도시의 중요한 지표생물 指標生物입니다. 1 급수에서만 산다는 물고기 같은 것 말입니다. 책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뚜렷한 관점을 지닌 소수가 자기에 취향을 받아 줄 도시와 골목을 뒤지고 골라 정착하는 것이 동네 책방입니다. 조금만 물이 흐려져도 사라락 다른 개울로 헤엄쳐 사라져 버리는 민감한 생물입니다. 테디 베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고, 길을 다시 포장해주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까다로운 부류입니다.
그러니, 매력을 얻고 싶은 소도시의 행정가, 사업가, 주민 여러분. 만일 여러분 동네에 작은 책방이 문을 연다면 부디 귀히 여기시길. 세련된 카페도 좋고, 유쾌한 술집도 지역의 매력을 높여줍니다만, 동네 책방은 마을 사람들과 관광객이 활동을 시작하는 출발점이며 귀하디 귀한 마을의 자산입니다. 현지인과 방문자들, 두 그룹이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고 관심사를 공유하는 곳으로 커갈 수 있습니다.
커뮤니티의 중심. 여행의 출발점. 이게 매력도시의 책방이 가진 가치입니다. 뜨고 있는 동네, 군산 월명동에 오픈한 동네 책방의 행보가 궁금하고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매력도시연구소]
매력도시 매거진 vol.03_군산
1편: 군산, 인터내셔널을 준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