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어쩌면 숙명이다, 빛까지 그리는 일
노을 산책
그녀는 유모차를 끌었다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당신의 18번을 열창하면서
무언가 풀어버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아기의 얼굴이 궁금하지 않았다
뒷좌석의 그를 보았다
그에겐 너무 작은 자동차를 타고서
운전대는 품에 안은 고사리 손에 맡기고는
언덕을 신나게 빠르게 내려갔다
그들만 모른다
주위가 흐려지는 효과
사진을 찍으려다
그들의 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아
눈으로만 담기로 했다
옆에서 보니 일탈
뒤에서 보니 순수
배경엔 늘
수평선에 걸린 붉은 것이 함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색작업 중인 건물 화가를 보았다
노을을 새참 삼아 껑충이는 두 다리
12층의 마당에서는 줄이 보이지 않으니
공중에 매달린 모습 마치 환상이다
양 옆 건물이 그를 지키고 있고
벽을 디디던 발은 사뿐 해를 밟는다
닿는 순간 여러 갈래로 퍼지고
주홍빛 누군가에게 다다른다
앞으로 옆으로 뒤로
어쩌면 숙명이다
빛까지 그리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