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진짜인 것.

.

by 아무개






- 포카라에서.

- 어울림이 집에 전화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물었다.

- 이유를 물었다.

- 어울림이 답했다. 내가 죽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눈을 떴다. 다섯 시. 어울림은 침낭을 덮지 않고 몸을 웅크리고 있다. 침낭을 덮어주고 잠시 누워있었다. 갑자기 맥이 풀린다. 순환 계통의 이상과 함께 날숨으로 내 수명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두려움과 걱정이 기분을 나쁘게 만들고 무기력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이 증상은 수년 전 티베트 여행 중 처음 경험했다. 고산증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이후 일정한 조건이 되면 종종 나타나기 시작했다. 증상이 심하지 않았지만 여행 일정을 망쳐버리거나 멈추게 했다.


토마토 수프와 계란을 넣은 야채 볶음밥을 주문했다. 어떻게든 먹어야 한다. 목구멍이 열리지 않는다. 억지로 몇 숟가락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어울림은 며칠 만에 화장실에 갔다. 어제는 걷는 내내 배가 아프다며 몇 번을 주저앉았다. 잠들기 전엔 배에 가득 찬 가스 때문에 힘들어 했었는데 다행이다. 이제 걱정이 되는 것은 나뿐이다. 무기력이 몰려드는 자신에게 한심하다는 의미로 한 소리를 내뱉는다. '아이 씨~'


어울림은 대학생 형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한다. 그들과 숙소가 같은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바람대로 되지는 않았다. 아침에도 출발을 하면서 형들의 오늘 숙소를 궁금해했다. 마지막 도착지가 같은 곳이니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말해 주었다.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는 분명 기대에 차오르고 있었다.


열 시 삼십 분.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차와 과자를 주문했다. 어울림은 딸기맛 환타를 골랐다. 보통의 트래킹 일정은 이곳 MBC에 오전 중으로 도착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오후에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여유 있게 올라 숙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을 맞이한 후 하산을 한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MBC에 늦게 도착하게 되면 이곳에서 숙박을 하고 다음날 새벽에 ABC에 올라 아침을 맞이하고 하산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보통의 일정을 소화한다.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



열한 시 십분. ABC를 향해 출발한다. 해발 3,700m를 넘어서자 냉냉한 구름이 바람에 흩어지며 대기를 식히고 지나간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안개가 물결처럼 흘러 다니며 꽃들을 흔든다. 흰색과 노란색, 보라색 꽃들의 향기는 안개와 함께 떠돌다 콧속의 점막을 통해 체온을 낮춘다. 어울림은 두통과 함께 코가 맵고 아리다며 괴로워했다. 천천히 깊게 입으로 숨을 쉬라고 말하며 이러저러한 말을 길게 덧붙여 늘어놓았다. 어울림이 불편한 기분을 들어냈다. 말이 많으면 상대가 피곤해한다. ABC에 도착하자 어울림은 먼저 형들을 찾는다. 우선 라면으로 점심을 먹었다. 어울림은 드디어 만나고 싶었던 형들을 만나 대기소에서 원카드 게임을 했다. 서로 웃고 떠들며 게임이 주는 긴장감에 들떠 한참을 즐겁게 놀았다.


놀이를 마치고 나자 어울림이 고산증세를 보였다. 잠시 내게 몸을 기대어 쉬게 했지만 정신을 가누지 못했다. 자리에 눕혀 놓고 마사지를 시작했다. 발을 끝으로 몸 전체 마사지를 끝내자 잠에 빠져 들었다. 저녁을 먹을 수도 없지만 그 보다 잠을 자는 게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대학생 일행 중 한 명이 고산증 약을 가져다 주었다.


나 혼자 저녁식사로 빵과 마늘버섯 수프를 먹었다. 어두워지자 대기소는 일행들이 늘어나며 더욱 활기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로의 관계를 확인도 할 겸 더욱 친밀하게 다가가고 있었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기도 한다. 그 중 대기소 전체의 주도권을 쥔 한 무리는 가이드를 중심으로 집중력을 높이고 있었다. 가이드는 카드를 이용한 마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노련한 손놀림에 더한 표정 연기로 무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의 동작 하나가 바뀔때 마다 일행들은 판타스틱을 연발하며 아낌없는 박수를 쳤다. 포터 서너 명은 한쪽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 한 쪽에서는 일정이나 공동의 문제를 나누는 십여명의 일행이 진지하게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본다.



어울림은 여전히 잠들어 있다. 그는 나와 함께 있었지만 한편 외롭고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통해 객관적인 안정감을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사람은 낯선 곳에 있을 때 자신과 동질성을 갖는 대상을 찾는다. 그런 대상을 만나게 되면 외로움으로 생긴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공통점을 찾으려 한다. 친밀한 관계 형성을 통한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다. 이런 행동들은 생각보다 열정적이다. 우연히 성씨라도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씨족 관련 저널리스트가 된다. 족보의 세부 사항까지 파헤치고 심층 분석을 해댄다. 피는 물보다 진하니까.


지역 연고는 혈연만큼 강한 유대와 친밀함을 만든다. 남자의 경우 상대와의 지역 연고가 없으면 우선 군대 복무 지역이 어디였는지 기억해 본다. 광주 사람을 만나면 그곳에서 군복무를 했던 이야기로 관계를 엮어낸다. 그다음은 함께 복무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모든 곳에서 모여든 청년들이 넘쳐나는, 인연 만들기의 구글 검색창이 바로 군대다. 경기, 강원, 전라, 경상, 충청을 총망라한 인연 자료들이 넘쳐난다. 만약 제주도 사람을 만나면 제주도 출신 선임이나 후임병을 세심하게 찾으면 되고, 그래도 안 되면 대대장이나 사단장을 소환하고, 그래도 안되면 여행의 경험을 뒤적거리면 된다. 여행을 간 적도 없다면 모두가 알만 한 유명인의 고향이 바로 제주도라는 고급 정보를 슬쩍 흘려주면 된다. 그것도 모르겠으면 '효리네 민박' 이야기로 화제를 몰고 가면 된다. 여기까지도 어렵다면 평소 너무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고, 다음에 꼭 갈 것이며 가게 된다면 여행에 대한 자문을 구한다고 말하라. 그리고 그때 꼭 다시 만나서 추억을 셰어 하자고 번호를 교환하면 된다. 끝.








어울림을 데리고 숙소로 가려면 손전등이 필요할 것이다. 밖은 깜깜해졌고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두운 바닥을 발로 더듬으며 간신히 방 번호를 확인하고 손전등을 가지고 나왔다. 허공에 불빛을 비추어 본다. 반짝이는 보석들이 쏟아진다. 빛은 멀리 하늘 어디쯤 달아나다 사라진다. 대기소로 들어와 블랙티 한 잔을 주문했다. 유리창에는 물방울들이 가득 맺혀있다. 밖을 보려고 손가락으로 물방울들을 쓸어 닦았다.창 가까이 얼굴을 들이댔다. 낯에 보았던 풍경의 윤곽이라도 보일까 어둠 속을 두리번거렸다. 이마와 코끝만 시렸다. 창에서 얼굴을 떼고 코와 이마의 물기를 닦아냈다. 유리창에 내가 보인다. 나는 가만히 나를 보았다. 밖이 어두워지자 내부의 빛으로 창을 통해 나를 볼 수 있었다. 나는 감각이라는 창을 통해 외부 세계의 모든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정작 나를 보려면 감각을 차단해야 한다. 밖이 어두워져야 유리창에 반영된 밝은 내부를 볼 수 있듯이, 외부로 향한 감각과 의식을 차단하면 비로소 자기를 인식하고 경험 할 수 있다.


그런데, 감각의 창을 통한 모든 것이 창밖의 풍경이었다면, 실제라 믿었던 모든 것이 감각이라는 유리창을 통해 본 외부의 세계였다면... 창밖으로 나서면 진짜를 경험할 수 있을까. 천만에. 경험도 이미 감각의 언어다. 감각을 제외하고 세계를 알아차릴 수 있을까. 우리는 창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생각은 점점 내 시야에서 멀어져 안으로 들어왔다.


.....

창에 비친 대기소의 풍경이 보인다. 거기에 내가 있다. 나는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를 보았고 내가 본 나도 나를 보았다. 둘은 말이 없었다. 누가 진짜 나일까. 진짜로 진짜인 것이 진짜 있기나 할까? 어울림은 여전히 자고 있다.








고쿨과 팁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십 달러 정도는 어떨까 생각하고 대화를 했다. 드문드문 영어 단어 섞어가며 의견을 나누었다. 그 단어는 '하우 머치'가 고작이었다. 아무래도 이십 달러는 줘야 되지 싶었다. 미리 내가 생각한 액수를 말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십 달러에 대한 민망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해발의 높이에 따라 모든 물품의 가격도 따라서 올라간다. 국제 전화 일분에 200루피. 뜨거운 물 샤워는 100루피. 배터리 충전 100루피. 식수 1리터 90루피. 모든 물품은 포터의 등과 두 다리를 이용해 이 높은 곳까지 이동한다. 아픈 노모를 등 바구니에 지고 포카라로 가는 남자를 만났었다. 아마 이틀은 족히 걸어야 병원에 도착할 것이다. 여기는 그런 곳이다. 건축에 필요한 재료들도 모두 사람이 날라야 한다. 생존의 모든 게 종아리를 뚫고 튀어나올 것 같은 핏줄의 힘으로 마련된다. 그런 수고를 밟고 우리의 여행은 의미를 갖는다. 이를 생각하면 어떠한 여행자라도 가격에 대한 의심이나 불만을 품을 수는 없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과 함께 그 이상의 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것을 마음 아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았다. 평소 내가 비난하던 부류와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을 했다. 인간의 신성한 노동 가치를 내 지갑 속에서 만큼은 다른 가치의 척도로 환산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부당하게 비난한 그들에게 사과 대신 공평하게 나를 비난하기로 했다.


'에라이 개~거지같은 자식아!' .....아....속이 다 시원하다.





- 자기 비난은 양심의 칼날을 무디게 한다.









너는 나에게 웃음만을 기억하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아빠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