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0개의...

계단을 세어야 하는 이유.

by 아무개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젯밤 어울림은 대학생 형들이 준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약은 반을 잘라 먹였다. 어울림은 밤새 내 등 밑으로 발을 밀어 넣으며 꼼지락거렸다. 허리와 옆구리가 뻐근했다. 새벽에 일어나 안나푸르나를 보려던 일은 그만두었다. 베이스캠프 표지판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는 것도 역시 그만두었다. 그냥 왔으면 된 거다.










비로 불어난 물은 영원히 길들지 않을 것 같은 얕은 물길을 따라 요란하게 흐른다. 돌아가는 우리는 차분함 속에 길을 나섰다. 품고 있던 뚜렷한 목표나 도전의식, 그것들에 대한 설레임이 없는 홀가분 한 마음이다. 아마도 그것들은, 해가 뜨면 밤이 사라지듯 필연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욕구이거나 욕구의 매개일 수도 있다. 나는 사라지는 것들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이다.


멀리 설산과 그 앞으로 구름이 머무는 초록의 산에서는 물이 태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설산의 빙하와 구름에서 벗겨진 비가 섞여 잉태한 물은, 흰 명주실을 늘어뜨린 것 같은 탯줄을 타고 계곡을 내려온다. 그 탯줄은 가파른 절벽에서 끊어지며 인간의 땅에 떨어져 부서진다. 성미 급한 어린 물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흥분과 성장의 기운을 참지 못하고 마구 내달린다. 물은 멀리 더 낮고 넓은 곳으로 가면서 요란하지 않은 속도와 함께 깊이도 갖춘 강이 될 것이다. 젊은 청년의 모습이다. 그리고 긴 시간을 흘러 산과 평야를 가르고 호수나 바다에 이르게 되면, 자기를 완성해 가는 중년이나 고요한 노인의 모습을 한다.













가능하다면 오늘 안에 촘롱까지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출발 두 시간 후 고쿨이 불가능하다며 오늘은 시누아에서 머무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미리 결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한 동안 말없이 걷고 걸었다. 어울림도 잘 견디고 있었다.


4시를 조금 넘겨 시누아에 도착했다. ABC에서 만났던 스페인 여자가 어울림을 반갑게 맞았다. 함께 있는 동안 카드놀이를 하며 가까워졌고 어울림에게 따뜻한 관심을 표현했었다. 조용하고 안정감을 주는 태도와 착한 눈을 가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긴장하거나 과장되어 보이지 않는 모습이 인상에 남았었다. 그녀는 조용히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가, 내가 궁금해하며 그녀의 시선을 쫓으면 동시에 그 기대를 이룬 것 같이 흐뭇한 미소가 얼굴에 번진다. 미소가 도착한 곳으로 내가 다시 시선을 돌리면 그때는 다시 반짝이는 눈빛을 동공의 안쪽으로 거두고 깊은 상념에 빠져버리고는 했다. 관조하는 듯한 차분한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녀와 나는 무사한 여행의 일정을 서로에게 기원하며 헤어졌다.


우리는 촘롱까지 가기로 했다. 두 시간 정도를 더 걸어야 한다. 어울림에게는 힘든 과정이 되겠지만 그래도 여유로운 내일을 생각하며 위안을 삼기를 바랐다. 한 시간 정도 내리막을 걸은 후 어울림이 버거워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앞으로 남은 한 시간은 오르막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어울림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재미 삼아 한 구간의 계단 수를 세어 말해 주었다. 잠깐이지만 관심을 보이며 힘든 기색이 조금은 옅어졌다. 어울림은 계단이 모두 몇 개나 되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갑자기 촘롱으로 가는 길의 오름 계단을 모조리 세기 시작했다. 백, 이백, 삼백... 숫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아마도 칠팔백 개의 계단 숫자를 넘기고 있을 때쯤 내게는 계단의 개수가 의무이자 어울림에게 주는 선물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나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저 어울림의 호기심을 위해 촘롱까지 오름 계단의 숫자를 모두 세고 드디어 마지막 계단을 딛고 올라섰을 때, 하늘과 땅을 향해 엄숙하게 그러나 멀리 세상의 끝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천둥과 같은 소리로 말한다. 내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숫자 하나하나가 비밀처럼 드러나게 된다. 마지막 계단의 숫자가 말해지면 세상에는 또 하나의 진리가 세워지게 된다. 아무도 한 적이 없는,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무의미한 일을 함으로써, 끝내는 의미를 만들어 낸 나의 얼굴은 한 없는 영광과 축복으로 빛이 난다. 나는 이미 모든 찬사와 존경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 이런 행복한 결말을 생각하며 나무로 만든 네댓 개의 계단이 있는 짧은 오르막부터 수백 개의 돌계단을 깔아 놓은 높은 언덕까지 계단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진리의 사전 안에 기록으로 더해졌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간혹 하나 또는 두 개의 턱이 나타나면 잠시 걸음을 늦추게 되었다. 분명 계단의 형식은 띄었지만 모양이 계단이라 하기에는 너무 근거가 빈약했다. 대체로 계단들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디딤판의 일부나 그것들이 차지했던 자리의 한 부분이라도 남아있어야 한다. 그 같은 특이점들은 물론이고 나무와 말뚝으로 흙의 유실을 방지하는 틀의 일부가 남아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랬었던 흔적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느려도 그 턱을 밟고 지나가야 하는 시간 안에는 계단의 인정 여부를 결정할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했다. 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계단인가 계단이 아닌가. 그것이 문제다. 아마도 햄릿이 삶과 죽음의 딜레마보다 더 까다로운 경험을 필요로 했다면 이곳을 걸었어야 했다. 어쨌든 나는 판단을 해야 한다. 계단은 아니지만 계단에 포함할 수 있거나 포함해도 되는 것인지, 반대로 계단이지만 계단이라고 볼 수 없거나 계단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인지, 더 나아가 계단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서 계단에 포함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인지, 나는 멈춤 없는 상태에서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진리의 크기가 클수록 모든 것에 이롭다는 무책임한 기준을 만들었다. 따라서 어떠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상태의 것은 숫자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결단코 과장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2,170. 이천 일백 칠십. 계단의 수.


어울림에게 계단이 모두 몇개였는지 말해 주었다. 어울림의 반응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세었으면 됐고, 어울림은 알았으면 된거다.










촘롱에 도착하니 어울림이 좋아하는 형들도 있었다. 만나길 기대하던 형들을 보고 어울림의 얼굴이 밝아진다. 제주도에서 왔다는 두 남자도 만났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기 위해 기다렸다. 그러나 물은 아주 시원했다. 너무 차갑다며 손에서 벗어나려 하는 어울림을 반 강제로 씻겼다. 잠을 잤지만 기억나지 않는 어떤 악몽으로 괴로운 밤이 되었다. 그래도 지났으면 된 거다.






마음이 어느 하나에 사로 잡히지 않으면 모든 것이 고요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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