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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린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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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개 Apr 02. 2020

네가 원하는 양은
  이 상자 안에 있어.

나도 상자가 필요해. 



... 어딨어?

... 거기에.




"큰 접시 어딨어?"

"찬장 두 번째 칸에."


"두부 있어?"

"냉장고에."

"없는데."

"그럼 슈퍼에."

"..."


무엇이든 어딘가에는 있어야 한다.


양말은 서랍에. 책은 책꽂이에. 칫솔은 욕실에. 영양제는 식탁에. 거북이는 어항에. 사진은 액자에. 의사는 진료실에. 범죄자는 감옥에. 카드는 지갑에. 아기새는 둥지에. 데이터는 약정서에. 둘째 딸은 자기 방에. 나그네는 어느 길 위에. 헤어롤은 이마에. 손목시계는 손목에. 술은 술잔에. 존재감은 좋아요 숫자에.


어린 왕자는,

자기 별에. 


그렇게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안심하고,

희망을 갖고,

기다릴 수 있다.


있어야 할 곳에 없다면,

생각지 못한 곳에라도,

있기를.


모든 것은 자기 자리가 있는 법이니까.

전화기를 냉장고에서 찾았다는 이야기가 재미있게 들린 것처럼, 원치 않는 곳이나, 뜻밖의 곳에라도.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는 엉뚱한 곳에라도. 


그래야 언젠가는 볼 수 있으니.


그곳이 어디든. 





2장. 



어린 양은 상자 안에 있고,

상자 안에는 어린 양이 있어.


그가 원한 건.

어린 양이 있는 상자일까.

아니면,

상자 안에 있는 어린양 일까.


오백 마리의 양을 그렸어도,

어린 왕자는 다른 양을 원했겠지.

그랬을 거야.


네 번째 그림에 상자를 그린 건,

아주 잘한 일이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오백 번째 그림에 상자를 그렸다면,

그동안 양이 또 늙어 버렸을 거야.

양은 상자 안에 있어야 해.

상자 안에는 양이 있어야 하고.


상자는 중요해.

밤에는 양의 집이 될 테니.


하지만,

양을 갖게 된다는 것은,

가슴 졸이는 시간도 함께 갖는 거야.


그는 하루에 몇 번씩,

가슴 졸이며 지낼지도 몰라.


양은 장미도 먹거든.


모든 게 완전하지는 않아.


오히려 잘된 일이야.


해가 지는 걸 보다가,

양을 깜박 잊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양을 돌보며,

장미도 지킬 수 있잖아.





내게도 상자가 필요해.


그 안에 내가 원하는 게 있겠지.


그런데,


몰라. 


원하는 게 뭔지를.


하지만,

상자를 갖게 되면 알게 될 거야.


아니면,

내가 원하는 걸 알게 되면,

그 상자를 찾게 되겠지.



모르겠어.






지금은.


어린 왕자가 필요해.


"안녕, 무슨 생각해?"

.

.

.

.

.

.

.

.


'네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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