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계속해서 오락가락하는 비.
오후에 퍼슈퍼티에 가기로 했다. 게으름을 피우다가 숙소를 나서는 몸이 부산해진다. 늘 그렇다. 일단 보더나트까지 버스를 타고 그곳에서 걸어가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을 찾기 위해 몇 번을 물어가며 한참을 걸었지만 찾을 수 없다. 언어 소통이 문제인가? 결국 정류장으로 보이는 곳을 찾았지만 보더나트행 버스는 없다. 더 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고 더 갔다. 그래도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분위기를 일찍부터 감지한 어울림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있다. 눈치를 보다가 여행 경비 추가경정 예산안을 뇌파로 전달해 본 회의에 상정했다. 예산 심의 안은 0.001초 만에 통과되었다. 충분한 예산을 확보한 나는 당당하게 택시를 기다린다. 계속. 택시가 보이지 않는다. 그 많던 택시는 어디로 갔을까.
여행자만 보면 짜증 날 정도로 들이대며 경적을 울리던 우리의 수많은 택시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그나마 보이는 택시도 왜 나를 외면하며 그냥 지나갈까. 손을 들어 멈추기를 요구해도 소용없다. 소문이 난 것일 거야. 올 때마다 가격을 후려치더니, 카트만두의 모든 택시기사들에게 내 몽타주와 함께 블랙리스트 1호 경계령이 내려졌다 생각 했다. 건너편 차량의 운전수와 내 눈이 마주쳤다. 걸렸다!
도착. 500루피. 시간, 체력, 정신건강. 모두 낭비. 흠...
화장터까지 가는 길은 한적하고 숲이 울창해 어울림이 만족스러워한다. 이 길은 현지인들이 주로 다니는 뒤쪽 산책로 길이다. 원숭이들이 많이 있다. 간식이나 음료수는 조심해서 가지고 다녀야 한다. 원숭이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낚아채가기도 한다. 노상강도. 어울림이 무척 즐거워한다. 그렇다면 나도 즐겁다.
이곳은 사원도 유명하지만 나는 화장터에 앉아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인도의 바라나시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바라나시는 어머니의 강 갠지스가 간직한 시바의 신성과 권위가 있다. 삶의 축복과 죽음의 애도가 공존하는 곳이다. 불에 탄 재로 변한 육신의 가루들은 강물에 뿌려지고, 살아있는 육신은 그 강물에 몸을 담그고 현세의 업을 씻으며 내세의 축복도 함께 기원한다.
이와는 다르게 퍼슈퍼티는 죽음과 그 애도의 시간만이 차분하게 있다. 강물이 시바의 옷자락도 적시지 못한 때문인가. 산 자들의 기원은 쉽게 찾을 수 없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여섯의 삶이 불과 함께 거두어지는 것을 한나절 가까이 지켜보았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잿가루와 연기가 열기와 함께 나에게 불어오면 신중치 못하게 몸을 움추렸었다. 나는 그 냄새를 잊지 못한다. 옷과 피부와 머리카락에 끈적하게 배어있던 불냄새는 샤워 후에도 남아있었다. 지금도 냄새가 달라붙고 있다.
시작과 끝을 구분 짓는다. 그 경계를 찾는다. 그리고 선을 긋는다. 최대한 나와 가까운 곳에... 의미 없는 경계 짓기를 또 한다. 삶과 죽음을 한 덩어리 안의 연속된 현상으로 이해하는 종교의 배교자가 된다. 삶의 관점은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죽음 역시 삶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개념을 달리한다. 나는 기분에 따라 늘 변한다. 변덕.
"아빠 가자."
"...그래."
주변을 산책하고 난 후 450루피에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오늘 택시비를 계산한다. 왕복 만오천 원정도. 찌질하긴.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았다.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곳을 선택했다. 순전히 어울림을 위해서였다. 알아주었으면 한다. 메뉴는 맛있어 보이는 것들로 고른다. 모를 때는 좋아 보이는 게 우선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하니까.
어울림이 꿈을 꾸는 듯한 모습으로 말한다. "꼭 영화 속으로 들어 온 거 같아." 오렌지 색 필터를 통과해 프린트 된 필름안의 자신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기분 좋은 긴장 속에 들떠있다.
조명과 촛불과 음악 소리와 종업원들의 작은 움직임들도 애벌레가 실을 뽑아 수를 놓는 것 처럼, 미리 예정된 것 처럼, 그리고 삼백년 동안 반복되어 능숙하지만 언제나 자기 일에 심취한 충실한 신하들 처럼, 여유있게 느리고 황홀한 장면을 만든다. 그것들을 풀어내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어울림도 새로 발탁된 주인공처럼 흥분과 긴장 속에 인사를 나누고 느리게 적응해 간다. 영화속의 훌륭한 배우다. 주인공이다.
어떤 이들은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라고, 주인공이 되라고, 주인공처럼 살라고, 그러라고 말한다. 어울림은 무슨 말인지 알겠니? 난 모르겠다. 그냥 내 생각을 말하자면 '웃기는 소리'다.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은 주인공을 원하지만 주인공이 되지 못한 사람이다. 주인공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주인공이 되면 저런 말 안 한다. 주인공은 타인도 주인공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말 할 필요가 없다. 주인공은 참견하지 않는다. 자기 역할이 바쁘다. 출연 장면이 가장 많으니까...
숙소로 돌아왔다. 주인공은 피곤했는지 씻지도 않고 잠을 잔다. 샤워를 했다.
아직도 불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