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엇과도 어울리지 않는.
회색. 흰빛을 띤 검정.
잿빛.
회색. 색이라 말하지만 색을 띠지 않는.
하늘은 잿빛으로 머물러 있다. 회색빛 하늘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하늘이다. 하지만 회색은 색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색을 띠지 않는다. 그러므로 '회색'이라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재의 빛깔과 같이... 흰빛을 띈 검정. 회색은 빛의 개념에 접근성을 두고 있다. 그래서 잿빛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럼 회빛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회빛'
회색. 이도 저도 아닌 것. 우리는 배척한다. 선택의 강요는 영원할 것 같다. 정치적으로 확실한 노선을 정하지 않거나 이념이 명확하지 않으면 회색분자라고 불렀으며 모두에게 공격을 받았다. 거대한 주먹 두 개를 코 앞에 내밀고는 -그 주먹은 서로 다른 조폭 두목들의 오른손이다.- 골라 잡으라고 으르렁 거린다. 더 아플 것 같은 손을 골라 잡는다.
사회는 아니 사람들은 선택의 범주를 너무 좁게 잡는다. 말했지만 둘 중에 하나여야 한다. 기껏 해봐야 나와 여럿들로 크게 나누는 것인데 역시나 둘 중에 하나다. 내가 여럿 중에 들어갈 일은 없다.
그렇게 내놓을 것이 없을까. 아무리 구색을 갖추지 않아도 이건 너무 없다 싶다. 고작 꼬질 하고 흉터뿐인 주먹 두 개. 다이소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뷔페나 김밥천국의 다양함을 원하지도 않는다. 그저 강요하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경계인'이라는 묵직한 직함도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경계인은 가장 경계가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것과 대상을 배척하고 공격하는 것은 다르다. 가장 비겁한 것은 양비론 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가장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대안은 없다.
혹시라도 점심 메뉴를 놓고 고민하는 내게 결정장애가 아니냐고 다그치면 이렇게 말해야겠다. 나는 회색을 미치도록 좋아한다고. 그게 무슨 뚱딴지냐 되물으면 나는 다시 내가 결정장애냐고 물은 것이냐고 되묻는다. 그렇다고 말하면 나는 된 발음으로 아주, 아주, 크게 말한다. "gray 샠이야!"
회색. 흰빛을 띤 검정.
잿빛.
생각.
잿빛 하늘은 엄청난 생각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 하늘을 바라보면 누구나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대개가 우울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 다시 말해 생각이라는 것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 이외에는 누구도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최면을 걸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을 하게 되면 자신들이 위험하니까. 지위가.
그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생각하는 사람의 그 과묵한 진실을 폄훼하고 왜곡해 왔다. 생각이 깊어지는 사람들을 신경증 환자로 만들기 시작하고, 그와 가까이하면 함께 우울에 감염되어 버린다며 모두가 외면하도록 했다. 그것을 보며 잿빛 하늘이 더욱 아름다운날, 생각하는 사람들끼리는 더욱 깊은 생각에 즐거워하며 한편으로는 조롱의 미소를 토해 냈겠지.
결국 우울은 부정한 것이 되었다. 우울이 왜? 우울은 깊은 생각의 우물을 파는 곡괭이와 같다. 그래서 생각을 할 줄 아는 그들은 우울을 즐긴다. 생각을 하게 하는 잿빛의 하늘을 그들은 경멸한다고 말하며 자신들은 깊은 생각을 위해 잿빛 하늘 사진을 한 장씩 품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말할 수 없이 미치도록 아름다운 저 깊은 잿빛의 시간들을 병적으로 거부하거나, 아니지 그 생각의 시간들을 알고 있는 사람을 거부하거나, 최소한 고상한 척하기 위해 시와 소설을 미끼로 그 회색의 하늘을, 회색을, 재빛을, 낭만의 서사 안에 가두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회색은, 생각은 낭만과 정략결혼을 했다. 이제 이혼이 도래한다.
원색의 하늘, 흰 구름, 빛에 반짝이는 밝은 녹색의 나뭇잎, 이러한 대비되는 명료한 감각 자료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 같지만 단지 우리의 감각적 욕구를 충족시켜 다른 생각들을 차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낮게 내려앉은 잿빛 하늘은 그러한 들뜬 사람들에게 최대의 지혜를 발휘할 시간들을 최고의 인내심으로 선사하기 위해 스스로 찢기는 고통도 감내하며 밝은 빛들에게서 우리들을 격리시킨다.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을, 미래를, 과거를, 현재를 건너뛰거나 옆으로 비껴 지나도록 하는 시간들을 주기 위해.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이라며 지구의 회고록을 긍정적으로 작성하던 중, 그리고 얼마 전 어떤 이는 생각을 존재론적 증명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멈추지 못하는 회의적 생각을, 즉 의심병을 인식의 수단으로 삼은 것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어쩌구 하는 말로 진리에 접근한 근사한 사람이 있었는데 아마도 조만간 많은 수의 팔로워들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겠다.
데카르트가 틀린 것은 아니다. 철학적 방법이야 뭐 각자 알아서 할 일이지만 그는 자신을 비롯한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는 소홀한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갈수록 인간들이 최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좋게 생각하면 생각을 아끼거나 모아두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시간 저축은행'직원들과 친분이 있는 모모도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생각을 하기에는 이제 사람들은 너무 게을러졌다. 게을러지기 위해 그동안 부지런했던지. 아니면 혹시 내가 모르는 수익률 높은 사모펀드에 생각을 몰빵이라도 했을까?
자극하지 않고 무심코 지나치게 만드는 회색의 하늘은 사물들을 최면에 들게 하고 빛의 횡포로부터 잠시 해방시킨다. 마음도 어두워지는 것 같다. 어두워지라고 하늘은 말한다. 어둠에 잠기면 가장 밝은 빛, 가장 작은 빛을 볼 수 있다. 너무 종교적인가? 아니다. 종교적이다. 아니다. 모르겠다. 종교의 참된 가르침이 가장 어두운 곳에서 시작되었으니까. 종교는 가장 흥미롭지만 종교인들이 가장 지루하게 만든다. 앗 미끄러졌다.
다시 자리 잡고. 마음이 어두워지면 삶의 실체를 찾고자 하는 본능이 자극된다. 빛과 색으로 무장한 제국의 지배로부터 잠시 시간의 사이를 비집고 우리에게 도착한 회색의 천사들은 전혀 다른 시간의 경험을 선사한다. 우리가 언제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학교나 가정교육으로, 아니면 자궁에서 세뇌를 당한 것이지 알 수 없지만, 외면하고 우울해하는 것이 그 잿빛 하늘에 대한 최고의 예우로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잿빛 하늘이, 회색빛이, 그 당사자가 직접 대면을 고집하며 대지를 잠들게 하고 사물을 최면으로 눕히고 오직 사람들에게, 나에게만 최면에서 깨어나게 하고 드디어 깨어난 생각의 손목을 잡아 이끌고 나아가려 한다.
그리고 하나의 빛을 보도록 권한다. 아. 말하다 보니 더욱 미치도록 보고 싶고, 더 미치도록 좋아하고 싶고, 더 미치도록 사랑하고 싶다. 회색이 내게 얼마나 이로운가. 나를 미치게 하고 비로소 내가 미친것을 알게 해 주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