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의 ‘양귀비 들판‘
참 예쁜 그림이다. 아름답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그림을 보자마자 이렇게 장담하듯 자신 있게 말하기를 주저한다.
알다시피 일상이나 인간관계, 특정한 사건에 대해 각자 개인마다 느끼는 감정도 다르고 대처하는 행동도 다르고, 어떤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정의나 기준 역시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대상이 예술의 영역 안이라면 말해 뭐 하겠나. 자칫 자신만의 감상을 보편적인 소감으로 규정짓듯 말했다간 뜻하지 않은 거부감과 비웃음의 공격을 당할 수도 있다.
인간의 역사 속에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미술사의 여정을 주욱 둘러보기라도 한 사람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감상자들이라 할지라도 어떤 그림 앞에서 선뜻 자신의 소감을 내뱉는 것을 망설이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다.
그럼에도, 모든 시대의 특징과 그에 따라 예민하게 변화해 온 예술성의 논란을 잠재우는 화가들과 그림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또한 모두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이런 화가들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그래도 자신 있게 자신만의 소감이나 감탄사를 쉽게 표현한다.
만약 그곳이 조용한 전시장 안이라고 해도 약간은 소리를 높일 수도 있다. 있다. 주변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왜냐면 당신들도 그렇게 느낄 것이라는 무언의 동질감이 강하게 오기 때문이다.
미술사에서 가장 오래도록 대중들의 인기를 누린다는 인상주의파의 화가나 그림들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림뿐 아니라 그들이 각각 보유하고 있는 흥미로운 서사가 더해져 그야말로 파고 파도 끝도 없이 재조명되는 인상파와 그림들. 누구 하나 놓칠 수 없고 어느 것 하나 지나칠 수 없는 그림들은 저마다의 아름다운 색채와 빛을 품고 사람들의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미술사를 따라가다 인상주의에 이르면 갑자기 그저 아름답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수많은 그림들이 화가들의 이름을 걸고 긴 줄을 서 있는 느낌이다.
눈을 감고 아무거나 뽑아도 실패가 없는 그림들을 나 역시 쉽게 감상하고 마음껏 찬사를 쏟아내기만 하면 되는 그림들이었다.
내게 클로드 모네의 <양귀비 들판>도 그런 그림 가운데 하나였다.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해설이 필요하지 않은 아름답고 예쁜 그림. 바라보기만 해도 밝은 기운을 선물처럼 주는 사랑스러운 그림. 그런 맑고 환하기만 한 기운 때문에 자칫 흔하고 통속적인 그림으로 전락할 위험성까지 갖고 있어 오히려 아슬아슬한 행복감을 주는 그림.
강렬한 양귀비 꽃의 붉은색이 점점이 들판을 뒤덮고 풀어헤쳐진 듯 넓게 퍼진 구름과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 나지막한 언덕 위에 서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숲처럼 늘어서 있다.
꽃이 핀 들판 길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꽃을 한 아름 안고 있는 아들과 한껏 봄옷을 차려입은 엄마가 천천히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다.
그 짧고도 긴 순간의 장면을 얼마나 놓치기 싫었을까. 그래서인지 모네는 언덕 위와 아래쪽에 같은 인물을 그려 넣어 움직이는 동선까지 한 캔버스에 표현했다.
모네의 개인사를 조금 더 알게 된다면 당시 아내와 어린 아들을, 그 시절 함께 살았던 아르장퇴유의 자연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더욱 느낄 수 있다.
그토록 사랑했던 두 사람을 아름다운 자연 속에 데려다 놓고 언제까지나 그들이 그 시간을 즐기며 행복해하길 바라는 모네의 넘치는 애정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을 예쁘다고 표현할 때는 닳고 닳아 식상해진 ‘예쁨’의 의미가 신선하게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든다.
이러다 보니 내게 모네의 ‘양귀비 들판’만큼은 오랫동안 어디 하나 트집을 잡을 수 없는 아름답고 예쁜 그림으로 간직되어 있었다. 그림이라는 영역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내 마음속 수장고는 빈약하고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가끔씩 꺼내보고 작은 위안을 삼는 그림 중에 모네의 이 그림이 언제나 포함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심히 꺼내 본 똑같은 그림이 전혀 낯설게 보이면서 여태까지 습관처럼 느껴지던 감정들이 전혀 다른 색깔로 훅 내게 다가오는, 아니, 달려드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게 바로 모네의 ‘양귀비 들판’이라니.
겨울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다시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습기도 하지만 그때 나는 감정적인 생존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기록’이라는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아무 의미도 재미도 없었다. 어색하고 짜증이 났지만 수행자의 마음을 흉내라도 내보자는 생각으로 기록이라는 글쓰기의 노동(팔운동)을 묵묵히 이어나갔다.
잘 살아보고 싶다는 의지가 생겨서 이 짓이라도 하고 있는 거라고 나를 다독였다.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은 있는데, 그것을 잠시 잊고 멀어지고 달래고 눈치 보며 모른 척해보는 노력. 그때, 문득 모네의 양귀비 들판 위쪽에 작은 집 한 채가 떠올랐다.
워낙 강렬한 색을 내뿜는 양귀비꽃의 색깔에 압도되어 들판 위쪽 언덕 나무 사이에 슬쩍 끼워져 있던 작은 집. 붓질 몇 번으로 쓱쓱 그렸을 아주 작은 집이 생각났다.
사실 그 집은 아예 없어도 좋을 미약한 존재였다.
여러 해박한 그림 해설가나 미술사가들이, 혹은 나를 포함한 일반인들이 이 그림에서 그 집을 언급한 걸 나는 여태 본 적도 들은 적이 없었기에 더욱 의아했다.
그렇지만 일단 그림 속 언덕 위 작은 집이 떠오르자 내 마음과 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구질구질한 삶의 권태, 지긋지긋한 싫증, 그렇지만 그래서 가엾고 애잔해서 내다 버릴 수도 없는 것들, 그 완고하고 딱딱한 것들이 살살 풀어지기 시작했다. 언덕 위에 집 한 채가 떠오르면서.
크고 작은 나무 사이에 숨어있듯이 작게 자리 잡고 있는 진정한 내 집.
-좀만 놀다 올게. 양귀비 꽃이 들판에 가득이야. 꽃무더기 속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노래도 부르고 우정 어린 사랑, 사랑이 담긴 우정으로 충만한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싶어. 결국 나는 돌아오겠지.
빈 바구니를 들고 언덕길을 올라 집 안에 들어서는 게 사실 그게 진정한 해방과 자유라는 걸 나는 알아. 그렇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엔 양귀비꽃 가득 핀 들판으로, 또, 여태까지 한 번도 발 디뎌보지 못한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야지. 여장을 풀고 거기서도 잘 놀다 보면 어쩌면 나를 닮거나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아보는 벗을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올지도 모르겠어.
기록장 몇 페이지에 걸쳐 쏟아내듯 이런 글을 마구마구 써대며 나는 여태껏 내가 싸우고 있던 정체가 상처와 고통의 기억과 회한과 깊은 슬픔과 그리움. 무지함, 눈물로 뒤범벅된, 결국은 죽어야 끝나는 그 모든 과정을 미치도록 견디기 싫었던 강렬한 의지였다는 걸 눈치챘다.
눈부신 계절의 아름다움에 그저 몸을 맡기고 내 곁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들과 손을 잡고 어여쁜 옷에 어울리는 모자를 챙겨 꽃으로 가득한 들판 기를 걸어내려가야 했다,
싱그러운 아침에 집을 나와 따스한 햇살 아래 오래오래 놀다가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달콤한 낮잠. 곧 다가올 노을을 기대하며 뜨거운 차를 홀짝이다 보면 타오르는 노을 속에서는 아무 말을 할 수 없겠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비로소 뒤돌아보는 언덕 위에 나의 집.
어쨌든 나는 그 겨울 어느 날, 클로드 모네가 그린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이 그렇게 다가왔다.
기록장에 글을 쓰는 내내 모네 앞에 보이는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들판을 그려나가는 거칠면서도 섬세한 붓질을 생각했고, 그리고 맨 마지막 언덕 위 나무들 사이로 슬쩍 끼워 넣은 작은 집 한 채를 생각하며 그림을 마치는 과정을 떠올렸다,
그동안 시대와 상관없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예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그림 한 점.
모네가 가장 행복한 시절에 그렸다는 ‘양귀비 들판은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을 유영하다가 이렇게 또 세상의 딱 한 사람의 따뜻한 겨울나기를 위해 기꺼이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기다려 준 그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