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 식탁에 앉아 있어요

앙리 마티스의 ‘붉은 방’

by 다락방나무

아이들이 한창 클 때 먹이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 세 아이의 제각각 다른 식성이나 취향을 맞춘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다. 일단 배부르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양을 맞추는 게 급선무였다. 이 정도면 되겠지 했는데 빈 그릇을 앞에 놓고 더 없냐고 물을 때가 가장 난감했던 것 같다. 다행히 양도 적당하고 맛있게들 먹는구나 하는 느낌이 올 때쯤, 유난히 식성이 좋았던 막내가 입안에 음식을 삼키지도 않아 불룩해진 양 볼을 앞으로 내민 채 오늘 점심은 뭐 먹어요? 간식은 뭘까? 저녁은? 하고 묻는다. 아침밥 먹으며 점심과 저녁을, 더구나 간식까지... 기대하는 아이에게 응, 그건 비밀이야. 이 정도의 준비된 대답으로 입막음을 하고 나서 나 혼자 속으로 가늠을 해 본다. 그러게, 또 뭘 해 먹여야 하나. 냉장고 안의 음식 재료도 떠올려 보고 부엌 구석에 놓여있는 양파나 감자들을 살펴보면서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은 채 그 많은 끼니들을 어떻게 해 먹고, 먹이고 살았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밥 먹은 자리를 치우고 후식으로 과일이나 차를 마시고, 또 그것들을 치운 자리에 숙제 거리나 책, 게임기를 펼쳐 놓았다가 따로 소파가 없었던 탓에 아이들은 그 자리에 앉아 각자의 포즈로 TV를 보며 웃고 떠들다 급기야 말싸움이나 때로는 육탄전을 벌이기도 했다. 세 아이의 본격적인 양육 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에 나는 이 모든 일들을 이곳에서 치러냈다. 그곳은 바로 식탁이다.


아이들이 클 동안 대충 4개나 5개의 식탁이 우리 집 부엌 한편에 놓였다가 어디론가 가버렸다, 너무 작거나 커서, 구조적 결함을 안고 있어서, 재질이 안 좋거나 더러워져서 등등의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 싶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함께 모이는 시간이 줄어들고 요리를 해야 하는 강박적 부담이 줄어들자 식탁도 점점 다른 의미의 가구로 자리매김해 갔다. 나는 비로소 깊은 밤 식탁에 앉아 새벽까지 눈을 부릅뜨고 글부터 썼다. 어떤 소설가의 한 마디가 큰 울림으로 다가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빈 식탁 모서리에 낙타 인형을 놓으면 갑자기 그곳은 사막이 되고, 나무 모형을 하나 놓은 순간 그곳은 드넓은 벌판으로 변한다고 했다. 정말 그릇이나 먹을거리들을 치우고 낡은 노트북과 책 몇 권, 필기도구들을 늘어놓는 순간, 더 이상 식탁은 가구가 아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공간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황야에는 이정표도 길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앉아 탁, 탁,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모습 자체를 황홀하게 상상하며 몇 주일 만에 원고지 80매 정도의 소설을 써냈다. 백색소음이 있고 넓게 자리 배치가 되어있어 글이 잘 써진다는 명당 카페나, 조용하고 쾌적한 도서관도 내겐 낯설기만 했다. 그저 밤중에 혼자 일어나 글을 쓰는 네모난 식탁 위가 온전한 내 세상이었다. 그러다 한 편 두 편 글을 쓰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다른 공간을 더 좋아하게 되고 무엇보다 오밤중에 시작한 글을 새벽까지 쓸 수 있는 체력이 안 되다 보니, 더 이상 식탁은 공간이 아니라 평범한 집 안의 가구로 돌아갔다.


가구에서 공간으로, 그리고 또다시 가구로 돌아간 식탁이 미술의 역사 속에서 상상 이상의 다양한 의미의 소재가 되거나 그 자체가 특정한 시기의 미술사 속에서는 ‘오브제’라는 예술적 용어를 지니고 당당히 전시장에 등장할 수도 있다는 건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또 다른 놀라움이었다.


앙리 마티스의 그림은 화가 개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미술 사조에서 그가 속한 ‘야수파’라는 명칭에 더 이끌렸다. ‘야수’가 갖고 있는 이중적 감정을 기대하며 그의 그림을 찾아보던 중 내 눈과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던 그림이 ‘붉은 방’이다. 청소년 시절 대부분 자신만의 방을 갖고 있지 않은 친구들과 모여 앉아 만약 우리만의 방이 생긴다면 무슨 색 벽지를 할 것인가 고민한 적이 있었다 한 친구가 온통 빨간색 칠을 하고 그 안에서 춤을 추며 지내겠다고 해서 우리를 경악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너는 결국 그러다 미쳐버릴 거야.”라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주었다. 빨간색으로 둘러싸인 방이라니. 미치고 싶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 ‘야수’라는 단어의 의미와 붉은색으로 떡칠된 숨 막히는 공간의 이미지를 장착한 채 마주한 마티스의 ‘붉은 방’을 보는 순간, 그림은 나는 부드럽게 녹여버렸고 미치게 하기는커녕 따뜻한 담요에 나를 둘둘 말아 내가 사랑했던 문학 작품 속 한 장면에 나를 데려다 놓고 사라졌다, 그림이 사라진 덕분에 눈은 여전히 ‘붉은 방’을 보면서 내 몸과 마음은 온전히 윤고은 작가가 쓴 소설 속 거리에 서 있을 수 있었다. 그 거리는 스페인 세비야 도심 한복판. 한여름 뜨거운 열기가 책을 읽는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본 적도 없는 아버지를 찾으러 스페인까지 날아와 주소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지만 그런 곳은 없다고 승차를 거부하고 가버리는 택시 기사들. 시에스타 시간이 되자 거리의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홀로 서서 오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는 주인공을 둘러싼 오후의 세비야는 점점 짙은 붉은색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 소설의 인상이 여기에 그쳤다면 나는 마티스의 그림 속 붉은색에 머리가 살짝 돌았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은 아름다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주소를 들고 아버지를 찾으려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버린 여행자. 그녀를 집으로 불러 배불리 먹이고 기타를 치며 즉흥적인 노래로 가여운 영혼을 위로해 주는 아주머니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내 집은 여기 안달루시아


그중에도 세비야 미솔테스거리 74번지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 이야기하려면 좀 길지


오랫동안 너를 보지 못했지


수많은 밤은 흘러갔지


그러나 밤은 테이블일 뿐


긴 밤은 조금 더 긴 테이블일 뿐


너와 나는 지금까지 긴 밤을 사이에 두고 조금 떨어져 있을 뿐


결국은 하나의 테이블에 마주 앉는다


......



‘붉은 방’의 강렬한 색채에서 차츰차츰 벗어난 뒤라면 전면에 배치된 식탁과 의자, 누군가를 초대할 준비를 하는 듯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마음인지는 도저히 알 수는 없지만 오히려 그 담담한 표정이 내게는 더 강하게 이입이 된다. 마티스가 어떤 이유로 방 안의 장식과 무늬들, 창문 밖의 풍경조차 거리와 입체감을 싹 무시하고 평면에 쫙 깔아 놓은 기법을 썼는지 전문가의 탁월한 해설보다 내게는 소설 속 노래 가사와 잘 어울려 마음 안으로 고요히 내려앉는다.


소중한 존재이면서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불화하고 미워하고, 혹은 애증으로 뒤섞여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 수많은 인연과 관계들. 그렇다고 살아있는 한 손을 놓을 수도 없는 안타깝고 고달픈 관계들은 시간도 공간도 상관없이 우리의 기억과 가슴속을 제멋대로 헤집고 다니다가 아프게 찌르기도 하고 약한 고리를 끊어 놓기도 한다. 미리 대비할 틈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 맥없이 당할 때도 있다.


하지만 다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모든 게 평면은 아니다. 그림 전면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식탁과 의자 두 개는 아주 디테일하고 현실감 있는 입체성을 갖고 있다. 흔히 말하는 ‘지금 여기’.


끝내 해결되지 않는 숙제를 끌어안고 이별해야 했던 사람들, 만나서 말없이 눈이라도 마주치고 싶지만 이미 죽음의 세계로 건너간 사람들, 이런저런 이유로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저 식탁에 앉히고 싶다. 그 식탁은 작지만 때론 넓어지기도 하고 길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마주 앉았다 해도 점점 멀어져 아주 멀리 떨어져 보이지도 않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식탁에 마주 앉아있다. 나는 그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차를 우리고 따뜻하게 데워진 그릇에 담아 식탁에 놓는다. 무슨 말인가를 하지만 너무 멀어 내 말이 안 들리는지 맞은편 그 사람은 아무 말을 안 할 수도 있다. 음식 그릇과 찻잔도 가져가지 않아 곧 식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또 음식을 하고 물을 끓여 그를 위한, 그의 몫의 차를 따르고 싶다.



앙리 마티스의 ‘붉은 방’은 원래 의뢰자의 요청으로 푸른색 바탕이었다는데 소위 화가의 변덕(?)으로 붉은색으로 변신한 그림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화가의 변덕 덕분에 나는 비록 소설 속이지만 세비야의 뜨거운 여름의 열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뿐인가. 야수파 사조의 핵심 기법이라는 평면성이 내게는 시공간을 넘어서는 그리움과 상실을 위로하는 사랑의 노래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붉은 방’이라는 그림이 오랫동안 나를 기다려준 가장 큰 고마움은 이 삶에서 만날 수 없는 내 사람들을 불러내 우리는 한 식탁에 마주 앉아있었다고 깨닫게 해 준 거다. 이건 뭐라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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