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 - ‘자동판매기 휴게소
투우장의 소가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잠시 숨을 고르고 쉴 수 있는 장소가 ‘퀘렌시아’라고 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을 갖고 있다. 소와 인간을 가두어 놓고 서로 대결시키는 투우는 어느 한쪽이 죽어야 끝이 나는 경기다 보니 아무래도 사람인 투우사를 보호하는 여러 장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야 숙련된 투우사의 화려한 기술을 더 오래 감상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 결정적으로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소의 모습을 더 짜릿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투우를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결말은 건장한 소 한 마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경기장 한복판에 쓰러지고 현란한 치장을 한 투우사가 땀투성이로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장면으로 끝이 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이미 어느 정도 예정된 패배, 곧 죽음을 눈앞에 둔 소가 찾아낸 그곳에 머무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은 죽음을 유예시켜 더 극적인 승패의 현장을 보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미 전투력을 상실한 지친 소가 동물적 본능으로 투우장 안에 어떤 장소를 정해 그곳을 감지하고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때만큼은 투우사도 소를 공격하지 않고 기다려야 하는 엄격한 규칙이 있다. 그래서 아주 드문 일이지만 죽어가고 있던 소가 그곳 퀘렌시아에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부활하듯 힘을 회복해 투우사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대반전 드라마가 펼쳐진다고 하니 더 놀라울 뿐이다. 이쯤 되면 아마도 관중들의 환호와 함성은 극에 달할 것이고 누가 인간이고 짐승인지 구별할 수 없는 광기가 경기장을 가득 메울 것이다. 인간의 광기 어린 욕구를 발산하기 위해 고안된 수많은 방법 가운데 퀘렌시아 때문에 참으로 정교하고 치밀한 잔인성을 드러내는 것이 투우 경기라는 생각이 더 확고해진다. 죽음을 피해 보려고 가는 곳이니 퀘렌시아의 뜻이 피난처인 것은 이해가 되지만 안식처라니. 이건 너무 하지 않은가?
다행히도 너무 하지만은 않다. 이토록 처절한 장소로서의 ‘퀘렌시아’가 투우장을 벗어나면 아주 다른 의미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류시화 작가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퀘렌시아를 우리의 삶에 적용시켰다. 인간은 대부분 더불어, 함께, 살아가길 바라지만 언제나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다. 사람에게 치이고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는 일에 짓눌리게 되면 에너지가 고갈되어 건강한 삶을 지탱할 수 없게 된다. 그럴 때 사람에 따라 가끔, 혹은 자주, 아니 아예 인생 전체를 누구의 간섭이나 어떠한 방해도 없이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기만의 안식처를 찾는 본능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힘들고 지쳤을 때 기운을 얻는 곳.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의 작은 영역’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아 회복의 장소를 찾고 있으며 스스로 치유하고 온전해지려는 의지가 있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퀘렌시아를 안다. 인간 역시 언제 일을 내려놓고 쉬어야 하는지 안다. 우리가 귀를 기울이면 몸이 우리에게 말해준다. 퀘렌시아가 필요한 시기임을.’
당신의 퀘렌시아는 어디인가? 어떤 시간인가?를 묻는 작가의 물음에 내가 떠 울린 그림 한 점이 있다. 바로 에드워도 호퍼의 <자동판매기 휴게소>이다. 깊은 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고속도로 중간쯤에 설치된 무인판매 휴게소. 차를 세우고 잠시 들러 간단한 음식이나 음료를 먹을 수 있도록 자동판매기만 빙 둘러 설치되어 있을 삭막한 실내에 한 여자가 테이블에 혼자 앉아있다. 컵 손잡이를 쥐고는 있으나 어쩐지 따라만 놓고 오랫동안 마시지 않아 차갑게 식은 듯한 찻잔을 내려다보기만 하는 것 같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도 하지만 머리와 가슴을 비우고 그저 멍하니 아무 생각 없는 무심한 표정이기도 하다. 그림이 주는 전체적 분위기는 사실 아주 통속적인 앞뒤 얘기를 상상케 한다. 오밤중에, 여자 혼자, 무인 판매기의 음식과 음료(맛을 상상해 보라)를 앞에 두고 바라보기만 한다. 먹거나 마실 생각이 없다. 아니면 그럴 힘조차 낼 수 없는 상태? 사랑했던 연인이나 남편, 친구, 가족과 아픈 이별을 하고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길을 나선 것 읽까. 아니다. 어떤 강압에 의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무표정한 얼굴은 우울하고 어둡다. 이 여자에게 무슨 절망적이고 고달픈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림을 보며 내 느낌은 이렇게 흘러간다.
그런데, 순간 어딘지 낯설지 않은 익숙함이 느껴진다. 언제라고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어느 한 시절 나 역시, 아이들이 모두 잠든 거실 식탁 의자에 철퍼덕 걸터앉아 흑인 여가수의 오래된 재즈를 틀고 무한 반복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전혀 내 취향이 아닌 아무 카페에 들어가 아무 테이블에 앉아 먹지도 못하는 커피를 시켜놓고 컵에 담긴 시커먼 물속을 한참 들여다볼 때도 있었다. 그때 긴 머그잔에 가득 담긴 커피는 아마도 내겐 까마득한 심연이었을 것이다. 하나 더. 을씨년스러운 초겨울 공원 구석진 자리에 놓인 벤치에 앉아 발밑에 개미 한 마리가 과자 부스러기를 필사적으로 끌고 가는 모습을 간절한 마음으로 지켜보다 어느 순간 바람에 감쪽같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림 속 여자처럼 그렇게 앉아있었던 것 같다. 낯선 땅 외국에 가서도 나는 기껏 동네 강변 벤치에서 슬슬 어둠이 몰려올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앉아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었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나타나는 나를 눈여겨보았는지 먹을 것을 기대한 크고 징그러운 백조가 눈치를 보며 내 앞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나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나를 똑바로 쳐다보길래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두서없이 백조한테 중얼거렸던 기억도 있다. 이탈리아를 갔을 때도 중세시대 도시였던 마을 광장 의자에 두 시간이 넘도록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내리쪼이는 햇빛에 다 먹지 못한 아이스크림이 녹아 손에 끈적하게 묻어나는데 씻을 생각도 안 하고 그저 넋 나간 사람처럼 관광객으로 가득 찬 광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누군가 그 순간 정신 나간 여자처럼 앉아있는 나를 보았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쓴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굴뚝에서 나오는 희미한 연기일 뿐’
맞다. 왜 그런 시간이 내게 필요했는지 지금은 싹 다 잊혔지만 그 순간 나는 고요하고 평온했고 툭툭 털고 일어설 때 행복했다. 가끔씩 꺼내 봐도 기분 좋아지는 추억이 되었다.
<자동판매기 휴게소> 그림을 보는 순간, 가라앉은 색감과 간결한 구도 그 안에 앉아있는 여자를 보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지금 당신은 멈춰있군요.’
부디 더 가라앉고 가라앉기를. 표정도 몸짓도 생각도 멈춰있는 이 순간, 이곳이 바로 당신의 퀘렌시아일 수도 있답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세계와 이 그림에 대한 다양한 해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들이 있다. 현대인들의 고립된 삶, 고독감, 우울, 슬픔, 소외, 황폐한 배경 속에 놓인 외로운 인간 등등. 칙칙하고 어둡다. 호퍼 자신조차 너무 도식적으로 해석되는 세간의 평가를 스스로 부정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의도적으로 그런 어두운 면이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저 일상 속에서 발견한 한순간의 장면을 그렸을 뿐이라고. 하긴 우리가 하루의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의 표정만 살펴보더라도 무심하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대부분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글로 치자면 행간을 읽어내도록 여백을 남겨둔 호퍼의 그림을 보며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추측과 이야기를 생각해 낸다. 생략된 빈자리에 보는 사람마다 자신의 무한한 상상을 채워갈 수 있는 것이 호퍼 그림의 강력한 매력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호퍼가 남겨둔 그림 속 빈자리에, 출입구와 창문도 없어 오히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퀘렌시아에 머물러 있는 한 사람, 혼자만의 온전한 시간 속에서 자신과 만나고 있는 한 사람에 대한 감상을 슬며시 놓아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