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드가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불빛, 절망 속에 피어나는 희망, 쓰러져도 기어이 일어나겠다는 의지, 지금은 떠나도 언젠간 다시 올 거라는 확신, 잊혔지만 생각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 오해를 견뎌내는 힘.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선은 악을 이긴다. 혼자가 아니다. 함께 가자 우리! 등등
감동과 위로를 주는 것 가운데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들이다.
고통과 괴로움 속에 파묻혀 허우적대는 사람에게 이것은 말만으로도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될 수 있다. 떨치고 앞으로 나가기 위해 부여잡을 수 있는 든든한 밧줄이 되어 줄 것이다.
굳이 남이 해주지 않더라도 스스로에게 이런 말로 자신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면,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어둠 속 터널을 이미 빠져나온 셈이다.
더 나아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깨달음의 계시처럼 강한 영향력으로 어려움을 단번에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날을 잠깐 되돌아봐도 이런 다짐과 위로를 하며 무너지려는 나를 추스를 때가 있었던 것 같다.
다만, 내게는 이런 말들의 위력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작용한다는 느낌이 드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천성적으로 삐뚤어진 데가 있는 것인지 어릴 때나, 지금보다 젊었을 때까지도 나는 밝은 빛 뒤의 그림자를 웃음 뒤의 눈물을 참을성 속의 분노를 진리 속에 뒤섞인 위선을 찾아내기 급급했다.
패배자의 심정에 숨어있는 쾌감, 승리자의 불안감, 무관심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자유, 함께 하지 않는 해방감, 제발 혼자 있게 해 줘. 주로 이런 것들에 대한 관심과 바람이 훨씬 더 컸다.
이랬던 내게 한 여자가 다가온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그 여자에게 다가간다.
에드가 드가의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들’이라는 그림 속 여자다.
마신 흔적이 없어 처음 부어 놓은 그 상태 그대로 채워져 있는 유리 술잔을 앞에 놓고 가만히 앉아있는 여자. 제목과는 다르게 막상 앞에 있는 술에는 아무 관심도, 아예 마실 생각도 없는 듯한 모습이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여자의 표정을 보는 순간, 내 모든 감각은 멈추고 잠시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온다.
뭔가를 느끼고 생각할 틈도 없이 그 표정 속으로 스며든다.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고 보이는 그대로를 의심하거나 매끈함 속에 감춰진 미세한 균열을 찾아내는 데 익숙한 내 감각은 어디로 간 것일까.
초점 잃은 흐릿한 눈동자는 눈꺼풀에 반쯤 덮여있고 불그스레한 코와 겨우 다문 입. 구부정한 등과 축 처진 어깨, 내려뜨린 두 팔, 벌어진 다리. 아래로 아래로 꺼져내려 가는 듯한 여자는 지금 온몸으로 울고 있다.
당시 파리의 사람들은 이 그림을 혐오스럽게 여겼다. 아침부터 독한 술을 마시는 알코올중독자의 추한 모습을 굳이 그림으로 남긴 드가도 어지간히 욕을 먹은 모양이다.
평소 발레리나의 화가로 유명한 드가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자신의 명성에 스스로 칼자국을 낼 줄 알면서도 무명 여배우나 친구를 모델로 세워 이런 장면을 연출한 의도를 나로서는 짐작하기 힘들다.
다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끌리듯 다가가 그림 속 여자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은 나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그가 알았으면 좋겠다.
“잠시 옆에 앉아도 될까요?”
이렇게 말을 붙인 나는 여자의 옆에 끼어 앉아 마시지 않을 술 한 잔을 시켜 앞에 놓고 혼자 중얼거릴 수도 있다. ‘용서’에 대해서. 용서란 누군가에게 잘못을 해서 해를 입혔을 때 상처 입은 당사자에게 받을 수 있는 것인데 나는 사실 살면서 내가 뭘 잘못하며 살았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빌리 홀리데이라는 재즈 가수는 말년에 마약에 절어 전성기의 목소리를 완전히 잃어버리고도 앨범 제작사 녹음장에 나타났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오케스트라의 연주 속에 마치 소음처럼 메마르고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가 노래를 한다.
그 녹음을 끝으로 그녀는 길에서 쓰러져 행려병자로 죽음을 맞이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책 속에서 빌리 홀리데이의 마지막 앨범을 언급하며 그녀가 병들어 망가진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자면 모든 걸 용서받는 느낌이라고 썼다. 자기도 모르게 저질러온 그간의 잘못들에 대해 그녀는 이제 그만 잊어버려도 된다고, 그렇게 위로를 받는다고 썼다.
누군가 내게 ‘난 너를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한들 나는 별로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내가 뭘 잘못했는데? 누군가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만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반문했을 테고 오히려 난 말했겠지. 미안하지만 용서 못하는 건 너의 몫이야. 이렇게 되돌려 줬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빌리 홀리데이의 마지막 앨범을 찾아들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오래 들었다.
그러다 에드가 드가가 그린 그림 속 여자를 보면서, 눈물로 가득 찬 그녀의 슬픔과 테이블 모서리 끝에 놓인 마시지 않은 술잔을 보면서, 내가 모르는, 몰라서 더 두렵고 안타까운 내 잘못들에 대해 용서받고 싶은 마음을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내가 발견한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들’이라는 그림 속 여자는 아주 오랫동안 액자에 담겨 미술관 벽에 머무를 것이고 원한다면 나는 언제든 그곳에 가서 그녀 옆에 앉아 잘못에 대해, 용서에 대해 주절거릴 수 있을 것이다.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