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느질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스밴드 마을의 퀼트 - 로레타페트웨이의 ‘게으른 아가씨의 바(Bar)’

by 다락방나무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다리를 건너거나 배를 타고 15분 정도만 오가면 유럽과 아시아 대륙간 이동이 가능한 땅 튀르키예.


역사나 종교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문화가 흘러들어 공존과 변화를 거듭하며 풍성한 문화 유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더구나 독특한 자연환경 덕분에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죽기 전에 가 봐야 할 여행지에 튀르키예를 빼놓지 않는다.


옛 수도 이스탄불에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시장이 있다. 이름하여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 4천 개가 넘는 상점이 들어선 상설 시장이다. 중세시대 번영을 누리던 시기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축소된 것이 이 정도라니 당시 도시 전체의 규모와 이슬람 경제 세력권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날씨와 상관없이 활발한 상업활동을 위해 높고 둥근 돔 형태의 지붕을 덮은 시장은 건축물로서 아름답기까지 하다. 역사적 가치를 지닌 유적지가 오늘날에도 시장으로 이용되고 세계에서 몰려드는 여행자들로 북적이고 있다. 통로 길이가 약 30~60킬로미터나 되고 드나드는 출입구만 22개나 된다고 하니 나 같은 지독한 길치가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는 그야말로 끝없는 미로에 갇혀 헤맬 수도 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어떤 무명작가가 쓴 소설 속에 망명객 신분으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여행을 마치고 이스탄불을 떠나는 마지막 날, 왜 하필 마지막 방문지가 그랜드 바자르인지를 묻는 친구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이곳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길을 잃고 헤매는 거야.”


마중 나온 친구와 그의 어린 아들은 커다란 청동문 안으로 사라지는 남자에게 손을 흔든다. 나는 책을 덮지 못하고 남자의 마지막 말을 되뇌었다.


‘하고 싶은 일이… 길을 잃고 헤매는 거야.’


세상의 물건이란 물건이 모두 모여 진열되어 있는 곳, 세상의 이곳저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제 갈 길을 가느라 어깨를 부딪치고 밀치는 곳,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진귀한 것은 헐값으로 팔려나가고 세상 하찮은 물건이 터무니없이 높은 값으로 매겨지는 곳. 교활한 속임수와 넉넉한 인심, 푸대접과 호의가 뒤엉키는 그야말로 난장판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밀려다니는 한 남자의 모습이 깊이 각인되었다.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 다가와 나가는 문을 찾을 때쯤 남자는 과연 출구를 제대로 찾았을까. 누구나 아는, 닳고 닳은 말을 아주 조심스럽게 읊조리며 나는 책을 덮었다.


“인생이지. 그게 삶이지. 길을 잃고 헤매는 거.”


이런 맥 빠진 얘기를 진지하게 반복하는 것은 한심하기도 하지만 안쓰러운 일이기도 하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건 분명 두렵고 불안한 일이다. 그런데 아예 정해진 길 따위가 없는 곳에서 정해진 길이 있다고 믿으며 찾아 헤매는 게 또 인생이라 그렇다.


막내아들이 사춘기 때 내게 물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나는 즉각 답을 줬다. 모른다, 나도 모르기 때문에 살아보는 거다. 혹시 누가 그럴듯한 대답을 해주면 내게도 가르쳐달라고. 좀 더 커서 아들이 또 내게 묻는다. 내가 앞으로 뭘 하고 살았으면 좋겠냐고. 나는 또 즉각 대답했다. 뭐라도 하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그게 뭐든 뭐라도 그냥 하면 된다고. 아들은 고맙다고 했다. 자칫 무성의한 말이라고 핀잔을 줄 법도 한데 자신에게 필요한 말을 들었다 하니 나도 기뻤다.


보통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삶을 계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짧고 길게, 심지어 경제적 여건만 된다면 죽어서 묻힐 무덤의 장소와 방향, 인테리어까지 미리 계획하는 사람들도 있다. 당사자가 아니더라고 자손들이나 가까운 지인들이 발 벗고 나설 때도 있다.


단언컨대 부질없는 일이다.


살면서 닥치는 문제들은 시도 때도 없고 아무 예고나 조짐도 없이 불시에 문을 두드린다. 망설일 필요가 없이 그것들을 맞이해야 한다는 걸 어리석게도 나는 한참이나 살고 나서야 알았다. 시간을 끌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걸 늦게 깨달았다. 어디서 왔냐고 무엇 때문에 왔냐고 따질 필요도 없다. 그저 얼른 문을 열고 맞아들여 내 삶의 어느 곳에 배치해 놓을 건지 선택하면 된다. 그곳이 제대로 된 위치인지 금방 알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정 맘에 들지 않는다든가 이곳보다 저곳이 낫다 싶으면 옮기면 그만이다. 물론, 그 과정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너무 오랫시간 눌어붙어서 떼어내 옮기는 게 힘들 때도 많다. 억지로 잡아 뜯은 자리가 단번에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다. 회한과 원망, 분노와 인내, 한숨과 눈물로 지독한 불면의 밤을 홀로 견뎌야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상흔을 남기게 되는데 그게 아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퀼트공방을 운영하는 친구는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며칠 밤 잠을 설친다고 한다. 자려고 누우면 천장에 여러 원단 조각들이 떠오르고 그것들을 이리저리 배치하다 보면 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무늬와 색깔에 따라 수없이 달라지는 변수를 보는 건 분명 즐거운 작업이지만 그만큼 힘든 선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도 막상 완성했을 때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작품이 나온다든지 예상했던 대로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고 손으로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퀼트를 다시 뜯어 다른 배치를 한다는 건 더 큰 고통이 뒤따른다. 대부분 아쉬움을 남기고 마무리하지만 가끔은 정 아니다 싶으면 뜯어서 수정하기도 한다는 말에 놀란 적이 있다.


퀼트공예의 제작 과정 역시 사람 살아가는 과정과 닮아있다.


수없이 흩어지는 삶의 파편들. 그 조각들을 이리저리 배치해 보면서 이어 붙이는 과정말이다. 손으로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더해져 비록 완성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쉽게 후루룩 뜯어 수정할 수 없는 특성이자 매력까지. 어딘가 많이 닮았다.


퀼트에 대해 아는 건 여기까지가 전부였는데 얼마 전,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원입니다>라는 책을 읽으며 지스밴드 퀼트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책에 실린 세 점의 작품 사진은(심지어 흑백사진이었다) 그야말로 내 머리와 가슴을 강타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는지 이 퀼트 이불은 미국의 내로라하는 미술관에서 사들여 소장하고 정기적인 전시회를 통해 벽면에 걸린다. 그뿐 아니라 각종 엽서와 책, 우표에도 등장하여 인기를 끌고 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퀼트 작품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현대추상미술 분야의 새로운 예술성을 부여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나도 동의한다. 쪼개기와 재구성을 손으로 직접 실현한 데다 창작자들의 삶 자체가 녹아들어 있는 풍부한 스토리까지 더해져 입체적 추상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지스밴드 마을의 여인들이 자신들의 할머니나 어머니를 통해 개인적으로 배웠거나 공동 작업을 통해 집단적으로 아프리카 전통 퀼트공예 기법을 전수하는 과정을 거쳐 탄생한 작품들이라니 그 기하학적 무늬와 색깔의 구성이 더욱 놀라울 뿐이다.


안타깝게도 작품들에 대해 책에서 언급된 원단의 질감이나 색감이 인터넷상의 사진으로는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순전히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책을 쓴 패트릭 브릴리의 해설과 감상에 의존해 상상력을 발휘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1800년대, 지스밴드 목화밭을 사들인 백인지주는 땅과 함께 딸려온(?) 흑인노예를 소작농으로 마을에 정착시켰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그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했지만 그 시기에도 여자들은 퀼트를 놓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불과 담요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통나무 오두막에서 겨울을 지내야 하는 참혹한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옥수수 껍질로 만들어 거칠고 따가운 매트리스에서 뒤채다 겨우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녀들의 손길은 바빠졌다.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해지고 낡은 옷들을 꺼내 이곳저곳 성한 부분을 찾아 오려냈다.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버릴 수 없었다. 다양한 원단 재질만큼 두께도, 색깔도, 무늬도, 어느 것 하나 통일성 없는 조각들을 오려낼 때 그녀들은 되도록 면적을 넓혀야 했기에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모아진 크고 작은 조각천을 배치할 때 타고난 미적 감각이 발동하거나 윗 세대에게 전수받은 특별한 기법을 활용한 여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삶과 작품 과정에 대해 인터뷰한 자료를 보면 처음엔 실용적 목적으로 퀼팅을 시작했지만 이왕이면 색감과 크기, 무늬의 조화로움을 위해 노력하다 보니 뜻밖에 자신도 몰랐던 예술적 감각과 재능을 발견한 여성들도 있었다. 당연히 완성도 높은 퀼트 이불이 만들어졌다.


로레타 페트웨이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우울증과 힘든 노동에 지쳐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힘이 없었다. ‘가정폭력을 휘두르던 주정뱅이이자 도박꾼이었던 남편’까지 감당해야 했다. 모두들 어려운 상황에서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친구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지 조각 천들을 늘어놓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배열해 볼 여유가 과연 그녀에게 있었을까? 오로지 따뜻해질 잠자리를 생각하며 하나하나 즉흥적으로 이어 붙일 수밖에 없었다고 그녀는 그 시절을 회상한다.


책의 저자인 패트릭 브린리는 로레타 페트웨이의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 작품의 제목이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다. <게으른 아가씨의 바(Bar)>.


패트릭 브릴리가 작품을 묘사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보면 ‘왼쪽과 오른쪽 가장자리는 짙은 청색 데님 천이고 대부분의 줄무늬는 보라색이다. 그리고 서로 가깝지만 닿지는 않게 놓여있는 하얀 천으로 된 두 개의 줄이 중앙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지만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인터넷상으로 찾아본 이미지에서 그가 묘사한 모습을 완전히 느낄 수는 없었다. 촘촘한 바느질 자국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만든 다른 퀼트에 비해 단순한 구성과 색감이 눈에 띄었다. 동시에, 비교적 쉽고 간단하게 만들어진 작품을 보면서 농담처럼 자신을 ‘게으른 ‘ 사람이라고 표현했지만 곧 깊은 한숨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힘겨운 노동에 짓눌린 일상 속에서 덜 고민하고 덜 손을 써서 만들어진 퀼트는 조금이나마 휴식과 위안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휴식과도 같은 넓은 바탕 천 위에 긴 직사각형 천 조각(바, Bar) 두 개를 나란히 늘어놓았다. 물론 그때그때 있는 천 조각을 무심히 집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연히 마음 깊이 존재하면서도 결코 말로 표현되지 않는 ‘무엇’들이 걸어 나와 그것을 스스로 선택했을 가능성도 짐작해 본다. 삶을 막아서는 벽이나 창살, 경계, 그 너머의 세계를 향해 갈 수 없는 발목의 족쇄. 그럼에도 그것을 집어던지는 대신 오히려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해 실을 꿰는 순간의 모습은 내게 성스러운 이콘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미술관에 가서 실제 작품 앞에 설 수만 있다면 나는 ‘게으른 아가씨‘가 선택한 바(Bar)의 촘촘한 바느질을 보고 싶어 작품 앞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갔을 것이다. 한 땀 한 땀 같은 간격으로 이어진 바느질로 단단히 고정된 막대 무늬를 보며 어느덧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 같다.


바느질이라면 젬병인 내가 퀼트 바느질로 이불 껍데기를 하나 만든 적이 있다. 아예 무늬가 인쇄된 원단을 사서 밑에 얇은 솜을 대고 선을 따라 가장자리를 홈질만 하는 가짜 퀼트 작업이었다. 직선을 벗어나 삐뚤빼뚤은 물론, 실 간격도 넓었다 좁았다 내가 봐도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오로지 바늘과 실, 손가락의 움직임에 얼굴을 들이밀고 지루한 반복작업을 끝까지 이어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상한 분위기에 불현듯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상이 조용했다. 틀어놓았던 음악도 선풍기 소리도 멈춰있고 대문밖 골목길에 사람 지나다니는 소리, 자동차 소리, 새소리, 매미소리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등줄기로 차가운 기운이 쓱 내려가며 소름이 돋았지만 그 고요를 깨고 싶지 않았다. 한 손에 바늘을 쥔 채 멍청히 앉아 있다 정신을 차리고 이내 전투적 태세로 홈질을 이어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퀼트이불을 계절 가리지 않고 깔고 덮고, 참 많이도 쓰다가 식구들의 권유로 아쉬움 속에 떠나보냈다. 가끔 그 가짜 퀼트 이불을 생각하면 한순간 모든 게 멈춘 듯 조용해졌던 세상이 그리워진다.


<게으른 아가씨의 바>라고 제목을 붙인 로레타 페트웨이도 결코 게으름을 피울 수 없는 상황과 헤어날 수 없는 절박한 일상 속에서 자신을 가두는 ‘바’를 더 촘촘히, 더 단단히 바느질로 고정시키며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마을과 세상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해지는 시간을 맞이했을 수 있다. 그때 느껴진 평온한 자유는 순전히 나 자신이 내게 주는 은총이었다.


로레타 페트웨이의 다른 작품들은 그 마을 여성들의 작품들처럼 강렬한 색감과 섬세한 조각의 구성으로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도 있다. 미술관 관계자나 평론가들이 지스밴드 퀼트를 회화적 입장으로 보고자 한다면 나는 패트릭 브릴리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천을 누벼서 만든 퀼트이며, 나는 그 작품의 역사, 실용성, 아름다움, 감촉 등 거기 사용된 천 조각만큼 다양한 이유로 그 작품을 사랑한다.’라는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업에 대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바느질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러 전시가 열리고 축하받을 수 있는 자리에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미술관 경비원 자격의 특권으로 지스밴드 퀼트를 아주 세밀히 들여다보았을 패트릭 브린리는 전시관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은 자신의 상황에 갇힌 사람들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진실된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조각조각 노력을 이어 붙여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작품보다 제목을 먼저 좋아했고,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에 감동받는 이런 특별한 경험을 한 뒤, 어떤 말로 이 글의 마무리를 할까 생각하다가 더도 덜도 없이 그녀가 한 말 그대로를 옮겨 적는 게 최상의 마무리라는 걸 깨닫는다.


한때, 손바느질로 엉터리 퀼트 이불을 만들어 애지중지했지만, 나도 결코 바느질을 좋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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