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가 우리에게 건네는 말

고지마 도라지로의 ‘잠자는 소녀‘

by 다락방나무



첫 월급을 타면 부모님 내복을 사드리는 시절이 있었다. 전설의 빨간 내복은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두툼하게 만들어졌기에 여러 의미를 담은 기본 선물이었다. 부모님께 바치는 일종의 진상품인 셈인데, 시간이 지나도 상징적 의미는 여전히 유효해서 일종의 격언이나 속담의 자리에 등극한 우리의 빨간 내복이다. 요즘 시대에 맞는 첫 월급의 선물을 약속하면서도 “월급 타면 빨간 내복 사드릴게요.”라는 말로 부모 세대의 용어를 쓰면 기쁨 주고 사랑 주는 셈이 된다.


빨간 내복은 한국 고유의 정서와 의미를 담고 있지만 ‘첫 월급’ 은 어느 나라 사람이나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는 개인과 사회적 의미를 동시에 수행하는 듯하다. 한국과 일본은 가족과 직장동료들에게 선물을 한다고 하니 효도의 미덕과 부모의 희생, 집단 구성원들을 먼저 생각하는 사회성이 우선이고 가족애가 드러나는 훈훈한 풍경이다.


이것은 인간 보편의 마음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탈리아는 명품이나 고급 옷, 시계, 액세서리 같은 것을 산다 하니 사회인으로서의 외모와 스타일에 투자하는 편이고, 미국은 학자금 대출 상환이나 차 할부금으로 자신의 실질적 재정에 투자를 한다고 한다. 프랑스는 여행이다. 삶의 경험을 확장시키는 의미에서 본다면 프랑스인들의 경제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내가 가장 관심이 가는 사람들은 북유럽 사람들이다.


북유럽 사람들은 첫 월급을 타면 가장 먼저 자신을 위해 쓴다. 그게 ‘의자’다. 자신만을 위한, 나 혼자만이 앉을 수 있는, 나만의 의자를 산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일부러 나는 그 이유를 듣지 않았다. 그게 뭔지 너무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빨간 내복이 사회성이라면 의자는 개인인 ‘나’을 우선시하는 문화의 차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자신을 위한 많은 가구나 물건 가운데 하필이면 왜 ‘의자’일까.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날씨의 영향이다. 춥고 긴 겨울과 짧은 한낮. 그러다 보니 집에서 보내는 시간도 다른 기후대의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많을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우선 가족을 중심으로 우리 집이라는 공간이 소중할 것이고, 집 안에서는 또 가족들과는 별개로 자신만의 공간과 나만의 자리가 절실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울타리를 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내 의자’, ‘나만의 의자’에 앉는 행위가 아닐까 한다. 실제 스웨덴이나 덴마크는 가족 구성원마다 각자의 전용 의자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런 문화와 연결시켜 보면 첫 월급이란 이제 내 삶을 스스로 꾸려갈 수 있게 되었다는 선언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내 돈으로 산 의자는 아무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일종의 내 영토인 셈이다. 함부로 침범하거나 간섭할 수 없는 안정된 자리에 앉아 무엇을 하든 모든 결정권이 내게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이런 행복의 상징물이 의자가 아닐까? 장인 정신과 예술혼이 담긴 명품 의자들이 북유럽에 유난히 많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의자를 단순한 가구가 아닌 소형 건축물로 구현하거나 ‘사람의 몸과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는 신념으로 만드는 장인도 있다. 웬만한 예술론을 무색하게 하는 깊은 사상의 향기가 느껴질 정도다. 이런 의미라면 이것을 사는 구매자는 소비보다 투자에 가깝다. 마치 예술 작품 하나를 소장하는 마음. 내 인생과 행복을 위한 최소한의 투자.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북유럽인들의 첫 월급과 ‘나만의 의자’는 멋진 조합이다!


어디까지나 쓸모가 우선인 가구들과 마찬가지면서도 의자는 역사적으로 그 이상의 대접을 받아왔다. 권력과 지위의 상징, 권위를 과시하는 장식물이었던 시대에 의자는 그 자체가 계급이었고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가 현대로 오면서 일상의 일부로 기능적 가구가 되었지만 단순한 물건과는 다르게 시대의 문화와 개인의 취향, 심리적 요인까지 투영되는 특별한 물건의 자리는 놓치지 않았다. 시대 불문 많은 예술가들에게도 넘치는 사랑을 받아왔다. 미술 작품 속의 의자는 아예 작가 자신이거나 내면을 표현하는 매개체, 예술적 실험정신을 담은 오브제 등등. 어떤 식으로든 예술 전반에 자주 등장한다.


일본 미술사나 화가들에 대해 무지한 내가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는 사실은 일본은 근대 이후 정치나 사회제도 변혁을 위한 모델을 미국과 유럽에 두고 서양 문화를 적극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 문화나 예술도 서양에 흘러들어 가 유럽 예술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술사를 훑어가다가 유럽 인상주의 화가들이 일본 문화에 심취하여 작품 속에 일본풍 요소들을 버무려 넣은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


고지마 도라지로라는 근대 화가를 알게 된 건 일본 구라시키시에 있는 오하라 미술관 덕분이었다. 미술관을 세운 오하라와 고지마 도라지로의 특별한 관계도 인상적이었지만 대부분의 소장 작품들을 고지마 도라지로 가 화가들을 설득하거나 흥정하여 사들였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그렇게 사들인 작품들의 전시목록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대표작뿐 아니라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거장들의 애장 작품들이라 그 시대에 어떻게 이런 작품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그러니 오하라 미술관은 규모는 작아도 항상 많은 내외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되었다. 1930년대 지어진 그리스풍 건축물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으니 미술관과 그 주변 환경도 세월의 흔적이 운치 있게 어우러진 분위기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의 루브르나 오르쉐 같은 거대한 미술관은 나만의 감상과 관람의 시간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왠지 일본 오하라 미술관에 가면 작품과 나의 만남, 오고 가는 인사와 대화가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가 생긴다. 비록 밀려드는 관람객의 물결이 그곳도 마찬가지겠지만.


고지마 도라지로의 작품들이 미술관 메인 자리에 걸려있을 수 있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확실한 건 오하라가 그와 끝까지 신뢰 어린 우정을 나누며 누구보다 고지마 도라지로의 그림을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유럽에 일본풍 미술문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을 때 고지마 도라지로는 벨기에로 유학을 가서 둘 사이의 문화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예쁜 그림을 그렸다. 당시 그가 누린 인기와 찬사에 비해 일본 미술사에서는 물론 동서양 미술에서 그의 존재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잊힌 작가, 특정한 세태에 충실했기에 빠르게 존재감을 잃은 작가로 그 이름만 남게 되었다.


그의 그림 여러 개를 찾아보니 안타깝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주어진 냉정한 평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예쁜 그림들이었다. 예뻐서 비난받을 일은 없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예쁨은 비슷한 듯 하지만 가는 길은 너무 다르다.


<잠자는 소녀>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참 예쁘게도 그렸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탄성이 나왔다. 덩굴식물과 새, 꽃무늬가 화려한 패턴을 이루고 강한 색감이 대비되는 일본풍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카펫 위에 술 장식이 달린 오렌지 색 푹신한 의자가 놓여 있다.. 이것만으로도 눈길을 확 잡아끄는 예쁜 그림이 될 텐데. 서 있는 채로 의자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잠든 어린 소녀를 그려 넣었다. 어린아이만 따로 떼어 본다면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그렇잖아도 모든 어린것들이 잠든 모습은 이유 불문 평화롭고 애틋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데 하얀 피부와 통통한 볼, 머리의 리본 장식과 고급스럽고 깜찍한 원피스를 입은 아이는 마치 세밀하게 꾸며진 인형같이 비현실적으로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느낌은 너무나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가고 내게 남는 느낌은 어린 모델의 이중적 고단 함이다. 당시 유럽 귀족들의 사교 파티에서 여자들은 화려하고 눈에 띄는 드레스, 액세서리를 장착하는 것은 기본이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보완해 주는 살아있는 액세서리를 대동하는 게 유행이었다. 강아지와 어린 소녀가 대표적인 장식품이다. 좌중의 주목을 끌기에 이만한 것이 없다고 여겼다. 한껏 꾸미고 치장한 애완견이나 어린 여자 아이는 부모의 취향과 개성을 드러내고 돋보이게 만드는 분신이었다. 동시에 여자 아이인 경우 앞으로 귀족 사교계의 분위기를 익히게 하고 파티 예절을 미리 가르치려는 의도가 있다. 일석이조의 목적으로 동원된 아이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지루하고 피곤해질 게 뻔하다. 그렇다고 부모의 엄격한 지시와 감시 속에 그 상황을 견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밤늦도록 끝나지 않는 파티, 밀려오는 잠과 피로감에 견디다 못 한 아이는 파티장에서 떨어진 구석자리 의자를 찾는다. 푹신한 의자에 파묻혀 그대로 잠들고 싶지만 혹시나 질책이나 꾸중을 들을 것이 걱정되어 불안한 마음을 안고 선 채로 의자 팔걸이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빨간 립스틱이 칠해진 입술이 살짝 벌어진 걸 보면 깊은 잠에 빠진 걸 짐작할 수 있다. 훈련된 어른들이나 할 수 있는 쪽잠을 자는 아이의 수면은 고난도의 묘기에 가깝다.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고지마 도라지로의 상황을 상상해 본다. 이 어린 소녀는 그가 파티장에서 목격한 한 장면일 수도 있지만 작가가 미리 구상한 대로 장식된 어린 모델을 어르고 달래 포즈를 취하도록 요구했을 수도 있다. 여러 장의 그림을 스케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는 고단해진다. 그러면서 마침내 잠들어버린 모델의 포즈가 뜻밖의 장면을 연출하게 되고 작가로서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을 포착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왜 하필이면 이런 포즈로 잠든 아이가 눈에 들어왔을까. 옆에 있는 푹신한 의자에 파묻혀 깊은 잠에 빠진 어린이의 모습은 어떤 포즈라 할지라도 보는 이에게 위안과 안식을 줄텐데. 고지마 도라지로는 어른들의 욕망에 치어 장식물이 되어버린 아이의 고달픔에 연민을 느꼈을 수도 있고 그야말로 그저 돌발적인 상황 속에서 색다른 구도로 작품을 스케치하고 그림을 그렸을 수도 있다. 그 외, 여러 가지의 이유가 떠오르지만 그 부분은 순전히 작가 자신의 영역이라 나로서는 추측과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잠자는 소녀>를 오래 들여다보다가 내 눈길은 오른쪽 의자에 머문다. 화면 중앙에 워낙 눈길을 사로잡는 주인공 소녀가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밀려난 사물이 바로 의자다. 단순한 구조지만 의자가 갖춰야 할 여러 요소를 많이 품고 있다. 푹신함, 팔걸이, 강렬한 색감과 이국적인 재질의 덮개 등. 어찌 보면 누구나 편하게 앉으라는 배려보다 집주인의 고급스러운 취향을 과시하는 장식품 같은 존재일 수 있다.


만일 이 그림 속 아이가 의자에 파묻혀 잠이 든 모습이거나 그저 동서양의 조화로운 색감과 소재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면 내 상념의 날개가 펼쳐지지 않았을 터인데 의자 팔걸이에 상체만을 눕히고 선 채로 잠든 어린 소녀의 모습은 예쁘고 귀엽고 순수함으로만 바라볼 수가 없다. 사람으로 치면 누군가 어깨 한쪽을 내어주고 거기에 기댄 고단한 인간의 모습이 겹쳐지고 심지어 아직은 앉을 때가 아니라는 듯 굳이 의자 언저리에 기대어 불편함을 감수하는 인간 내면의 불안. 북유럽 사람들이 추구하는 의자의 의미…. 바야흐로 예술가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나만의 감상 세계가 펼쳐진다.


요즘 우연한 인연과 기회로 티베트 불교책을 읽고 있다. 도무지 해석이 불가능한 암호 같은 언어와 용어의 밀림 속을 헤매고 있긴 한데 그 가운데 불쑥 다가오는 몇몇 단어들이 있다. 이를테면 ‘바르도’라는 용어의 개념은 나를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죽음 뒤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숨 고르기를 하는 대기 상태, 끝없는 윤회의 흐름 속에서 죽음과 재탄생 사이에 놓인 중간 과정, 좀 더 확장시켜 보면. 태어나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그 사이의 시간을 살아가는 지금의 삶. 다시 좁혀보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경험과 경험의 틈새, 아직은 이도 저도 아닌 모든 중간 지점이 곧 ‘바르도’인 셈이라고 말한다. 바르도는 멈춤의 미덕과 새로운 변화와 전환, 반전의 용기, 익숙해서 아무 자극이 되지 않는 일상의 행위를 멈추는 일, 등등의 현상이 일어나는 시간적 공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바르도의 상태를 실감하게 만드는 일상의 사물을 꼽으라면 나는 ‘의자’를 떠올린다. 앞서 말한 북유럽사람의 의자, 공원의 벤치 의자. 회사 면접 시험장의 의자, 정거장에 놓인 의자, 지하철이나 기차, 버스 안 의자, 조직체계에서 내게 지정된 의자, 예술가의 작업장 의자, 벽난로 앞에서 두꺼운 안경을 쓰고 뜨개질을 하는 노인의 흔들의자… 평소에 무심히 보았던 가구로서 의자가 ‘바르도’라는 개념으로 바라보면 무수한 의미와 새로운 모습으로 밀려온다.


<잠자는 소녀> 그림 속 의자도 마찬가지다. 자녀를 예쁘게 꾸며 액세서리로 치장한 부모들이 주인공인 파티장의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해 볼 때, 뜨거운 열기로 달궈진 파티장을 벗어나 구석진 자리를 찾아올 누군가를 의자는 기다린다. 멈춤과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을 하거나 밀려오는 공허함을 달래고 싶은 누군가들을. 들뜬 마음과 환희, 짜릿한 즐거움을 뒤로하고 저 의자에 앉는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마음속에 출렁이는 흥분은 가라앉고 이제까지 눌려있던 감정들이 서서히 올라와 그를 무력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는 결심한 듯 집으로 돌아가거나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가 여태까지 형식적인 친절함을 유지했던 태도를 버리고 다소 무례하고 직설적인 말투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때, 다가오는 어린 소녀가 있다. 아이의 선택은 선 채로 팔걸이에 기대는 것. 애초에 잠이 들 생각은 없었지만 극심한 피로가 몰고 오는 잠은 순식간에 아이를 삼켜버린다. 아직 이 아이에게는 의자 전체가 ‘바르도’가 될 수 없다. 아이의 본능은 아직 그곳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기엔 이르다고 감지한다.


나만의 상념이 이 지경까지 뻗어나간 걸 알게 된다면 원작자 고지마 도라지로는 어처구니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그는 보았고 그렸으며 미술관에 걸었으니 관람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의 권한 밖이 되었다는 사실이 내게 감상의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고지마 도라지로의 <잠자는 소녀>를 알기 전에 나는 티베트불교에서 말하는 ‘바르도’의 상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머릿속에 나름의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모두 의자에 앉은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떠올랐다.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사람,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 자기 차례가 올 것을 알고 자리를 지키는 사람, 자신의 의자임을 알고도 선뜻 앉지 못하고 서성이는 사람, 의자가 있지만 아무 관심 없이 바쁘게 오고 가며 지나치는 사람들. 혼자 가만히 앉아있는 의자.


이런 이미지를 떠올리며 바라본 <잠자는 소녀>는 나만의 시선이 머무는 특별한 곳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그런 만큼 오하라 미술관을 직접 찾아가고 싶다.. 모네의 수련을 지나, 르누아르와 마티스, 피카소를 지나 고갱과 고흐, 모딜리아니를 지나치고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 앞에 오래 머물며 색채와 빛의 세례를 받다가 마지막으로 내가 도달한 그곳은 바로 <잠자는 소녀> 앞이 될 것이다.


우선, 섬세한 묘사와 조화로운 색채를 배경으로 천진하고 예쁜 여자아이의 잠든 모습은 따뜻하고 평화롭다. 그런데 그 평화로움은 오래가지 못한다. 삶의 고단함을 미리 겪고 있는 이 아이에게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거나 다가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그나마 아이가 기댈 수 있도록 한쪽 어깨를 내어주는 존재는 ‘의자’이다


. 어린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고, 더 나이 든 어른이 되어 노후의 시간을 맞이하는 곳, 그러다 강 건너 죽음이라는 세계를 어렴풋이 바라보는 그 자리, 자리마다 마치 쉼표를 찍듯 ‘의자’가 놓여있는데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다.


이렇게 우연히 마주친 그림 한 점 앞에 서서 내가 기대 있던 의자, 앉아있던 의자, 나를 기다리는 의자를 떠올리며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 깊은 한숨을 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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