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의 ‘웃는 렘브란트, 자화상’
0000년 00월 00일부터 내 사춘기는 시작됐다. 이렇게 우스운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이 성장 과정에서 겪는 특정한 시기가 명확한 년도와 날짜로 시작되고 끝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제까지는 아니었는데 오늘 아침부터 사춘기야. 생각만 해도 우스꽝스러운 말이다. 그런데 그 우습고 어이없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다. 비웃음을 사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정말 그 이유를 잘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고민이 된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그날의 상황을 원형에 가장 가깝게 복원할 수 있을까.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고 나야말로 그날 내게 일어난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해 궁금하기 짝이 없다. 정말 그런 일이 있기나 한 건지, 기억의 오류는 아닌지. 물론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긴 한데 그것에 대해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확답을 할 수 있다. 있었다!라고.
유년기에 내 신체 발달이 다른 애들에 비해 좀 더디긴 했다. 5, 6학년 때까지도 내가 달려가면 아버지가 다리 부러진다고 나를 말렸다. 밥을 잘 안 먹거나 너무 조금 먹어서 엄마가 화를 내며 이러려면 아예 간장 종지에 담아 먹으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마른반찬 두어 가지 외에는 쳐다보지도 않고 지독한 편식을 했다. 콩밥을 주면 찬물에 밥을 말아 콩을 골라내고 호박전을 주면 달걀만 베껴먹고 호박은 버렸다. 시골에 살면서 이런 밉상을 떨었으니 평소에 외손녀인 나를 물고 빨고 이뻐하던 외할머니한테 밥상에서는 등짝을 몇 대 맞기도 했다. 아마도 영양상태가 안 좋아 성장을 더디게 했던 것 같은데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생리도 하지 않고 가슴도 밋밋하니 브래지어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가정 선생님이 불시에 브래지어 착용 검사를 할 때가 가장 억울했다. 무조건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점을 주니 할 필요도 없는 걸 차고 다닐 수밖에. 당시 내 친구들은 사춘기의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얼굴에 여드름이며 기름기 때문에 짜증을 내면 여드름을 짜주기도 하고 가끔 치마나 체육복 바지에 생리혈을 묻히는 바람에 수돗가에 가서 처리를 할 동안 내 체육복 바지를 빌려준다거나 수건으로 가려주는 조력자 역할을 하며 지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지들끼리 누가 누구와 사귄다거나 버스에서 만난 남학생들에 대해 속닥거리면 나는 할 말이 없어 따돌려지기 일쑤였다. 시커먼 교복에다 단발머리 귀 밑 1센티를 자로 재서 혼나던 시절이니 멋을 낸다고 한들 머리카락 몇 가닥 얼굴 옆으로 내리거나 치마허리를 두어 번 말아 올려 입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걸 하고 안 하고에 목숨 걸 듯 교실 거울 앞에 줄을 섰다. 당연히 나는 같은 버스 타고 갈 친구가 꽃단장(?)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느라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애송이였다. 도대체 왜들 저러는 거야? 말은 못 하고 도무지 그 애들의 심리를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렇게 중학교3학년 여름 방학까지 나이만 청소년인 어린이가 바로 나였다.
그랬던 내가. 여름 방학이 끝나 2학기로 접어든 지 며칠 안 된 어느 날. 항상 붙어 다니던 단짝이 결석을 했는지 싸워서 각자 집으로 가는 중이었는지 혼자 집 가는 버스를 타게 되었다. 둘씩 앉는 의자에 사람들이 다 앉아 있어 나부터 가운데 통로에 손잡이를 잡고 서게 되었는데, 이럴 수가. 갑자기 사람들 모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게 아닌가. 내 아래위를 훑으며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마치 화살처럼 내게 와 박히는 것 같았다.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뭐가 묻었나, 안절부절 가슴이 뛰고 얼굴은 달아오르고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러다 까딱 정신줄 놓으면 까무러치기라도 할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창 밖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버텼다. 그런데 이를 어쩌면 좋은가. 그 와중에 유난히 눈길이 느껴지는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니 평소에 버스에서 마주친 것 같은 남학생 얼굴이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는 게 아닌가. 심지어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그 애의 눈, 코, 입 이목구비가 한눈에 쏙 들어왔다. 그 애뿐 아니라 여기저기 앉아있는 남학생들만 쏙쏙 눈에 들어왔다. 물론 아주아주 짧은 순간 바라봤을 뿐인데 너무 선명하게 얼굴 윤곽이 파악됐다. 잘 생겼다 못 생겼다까지 판단할 여유는 없었지만 그 애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자체에 온몸이 얼어붙어 정말이지 지옥이 따로 없었다. 어찌어찌 내가 내릴 정류장은 놓치지 않고 내렸으나 다리 힘이 풀려 휘적휘적 집까지 어떻게 걸었는지 정신이 없었다.
그날 이후, 내가 어떻게 변했을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 아니겠는가. 신기한 것은 그동안 성장 호르몬이 어딘가 모여있다 더 이상 그 양을 견디지 못한 건지 한꺼번에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갑자기 키가 쑥 크고 생리가 터지고 가슴이 불룩 나오고 엉덩이며 허벅지에 살이 붙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우선 엄마 화장대에서 안 쓰는 거울 하나를 내 방으로 갖고 와 수시로 얼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딱히 무슨 생각을 하며 거울을 뚫어져라 들여다봤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주로 내 얼굴에 대한 탐구였다. 어릴 때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면서 주로 건네는 덕담. 잘 생겼다든지, 이쁘게 생겼네! 엄마 닮아 이쁘네, 아빠랑 똑같네. 등등.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깡 시골에 살게 되면서 시골 아이들과 다르게 말쑥한 차림새와 새침한 말투로 이쁘게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유난히 낯을 가려서 아버지 손을 잡고 뒤에 숨어서 상대방의 눈을 피하는 모습도 어른들의 눈에는 귀엽게 보였나 보다. 내 얼굴이 참 예쁘게 생겼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거 같다.
그런데 사춘기가 되어 조그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니 그다지 예뻐 보이지가 않았다. 나 이렇게 생겼던 거야? 여기저기 불만이 생겼다. 전체적으로 비율이 맞지 않는 얼굴형, 넓은 이마 너무나 평범한 눈 코 입. 웃음을 지을 때 광대뼈 밑으로 쏙 들어가 주름살처럼 보이는 얼굴 근육,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눈 밑 아래에 짙게 드리운 다크서클과 짝짝이 쌍꺼풀이었다. 자세히 하나하나 뜯어보니 하나같이 결함이 있는 이목구비였다. 옆머리를 가져다 앞머리처럼 덮어서 이마를 가려보기도 하고 성냥개비를 이용해 외까풀인 눈두덩이에 금을 그어서 억지로 쌍꺼풀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여러 가지 표정을 지어보면서 맘에 드는 각도를 찾으면 한참 동안 그 자세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들여다보았다. 가끔 그렇게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딴생각에 빠질 때도 있었는데 그러다 화들짝 정신이 들면 거울을 붙잡고 앉아있는 내 모습이 무섭고 우스워서 거울을 집어던지고 낄낄거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낮에도 학교를 오가는 버스를 탈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눈길에 민감해지고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버스에 올라 손잡이를 잡고 서있으면 다 나만 쳐다보는 것 같은 착각 속에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런데 막상 힐끗 바라보면 사실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게 아닐 때, 창피하고 어이가 없어서 혼자 얼굴이 달아오르곤 했다. 가끔 모르는 남자애가 노골적으로 나를 바라볼 때 짜증이 나면서도 은근히 맘에 들었던 얼굴 각도를 돌리면서 괜스레 자존심도 상했지만 그 애가 내 얼굴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이렇게 내 사춘기는 오밤중 거울 속 얼굴 탐구와 나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미술사에 남은 거장들도 자신의 얼굴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다. 유난히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 중에 렘브란트를 꼽을 수 있는데 평생 그린 자화상이 무려 100여 점에 가깝다고 한다. 청년기부터 노년에 이르러 죽기 얼마 전까지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시간의 흐름을 따라 그렸기에 그의 자화상에는 개인의 역사뿐 아니라 시대의 역사, 혹은 누구나 겪게 되는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 담겨있다.
나는 렘브란트가 60대 노인이 되어 웃고 있는 자화상을 그린 그림 앞에 멈추어 선다.
“이보시오, 잠시만 멈춰서 나를 봐주시면 안 되겠소.”
그림 속 인물이 나를 불러 세웠기 때문이다. 나뿐 아니라 누군들 이 그림 앞을 무심한 마음으로 지나칠 수 있을까. 푸른 청춘의 초상부터 세파 속에서도 눈빛을 잃지 않았던, 아니 살아있는 생명력을 억지로라도 그려 넣었을 자화상과 달리 60이 넘은 노년의 자화상은 그림 위에 손을 대는 순간 마치 형체와 색채가 뒤섞여 뭉개지며 주르륵 흘러내릴 듯하다. 어떤 삶을 살아야 이런 얼굴과 표정으로 자신을 대면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램브란트의 자화상을 보면서 화가 자신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마주하는 그 숨 막히는 시간의 밀도를 생각한다. 보통 이 시대의 화가들이 이런 그림을 하나 그리는데 얼마의 시간이 드는지는 알 수 없지만 꽤나 긴 시간일 거라 짐작할 수 있다. 그 시간 속에 오로지 ‘나’와 ‘나’ 단 둘이 마주 보는 시간.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시간이라 생각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아마도 나처럼 잠시 등골이 서늘해질 수도 있다. 왜냐면, 왜냐하면 나는 내 얼굴을 절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고 있다는 착각을 할 뿐. 내 눈으로 내 얼굴의 실제 모습을 끝내 보지 못 한 채 우리는 생을 마친다. 내가 실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타인의 얼굴이지 자신의 얼굴은 그저 거울이나 물속, 유리 등에 비친 모습일 뿐이다. 입체가 평면으로 왜곡된 모습. 조명과 빛에 따라 계속 달라지는 모습. 그 어느 한순간의 모습을 자주 보면서 ‘나’와 익숙하게 지내고 있을 뿐이다. 가끔 외출하기 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나 모습이 제법 괜찮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내 얼굴에 대해 전혀 다른 느낌을 말할 때 그 이상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은 쉽게 수습되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이젠 하도 오래되고 닳고 닳아 지긋지긋한 이 질문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 끝내 내 눈으로 실제의 내 얼굴조차 보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 내 얼굴을 타인들은 알고 있다. 나의 진짜 모양새를 알고 있는 사람, 입체를 입체로 볼 수 있는 사람. 그들의 눈을 들여다봐야 나를 볼 수 있는 나. 이렇게 생각하면 그들의 존재가 누구든 허투루 생각할 수 없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연대기 별로 늘어놓고 보면 그는 여러 가지 소품과 의상을 설정해 연출한 작품들이 많다. 웃고 있는 렘브란트의 자화상 역시 일상의 모습이 아니다.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로 변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의상도 고르고 거울 앞에서 여러 자세를 취하면서 선택된 포즈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얼굴의 표정과 희미한 웃음의 흔적을 어디까지 디테일하게 묘사할 것인지 철저히 계산된 산물일 수 있다. 만일 이 작품의 모든 것이 작가 자신의 계획된 그림이라면 이 그림이야말로 그림이라는 시각 예술 너머 무한히 확장되는 세계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화상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향해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이나 말로써는 도저히 한정 지을 수 없는 삶의 깨달음을 그림은 말하고 있다. 늙고 추레한 노인의 얼굴에 깊고 얕게 패인 주름들과 늘어진 피부를 그리고 난 뒤, 빛을 잃은 눈동자와 옅은 웃음을 짓는 입술은 역설적으로 그 어떤 자화상보다 강렬하게 빛난다.
사춘기에 시작된 내 얼굴 탐구의 시간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이 지워져 다시는 찾을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는 잃어버린 시간이 되었지만 모년, 모월, 모일, 그날부터 느닷없이 ‘나는 누구일까?’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 내게 찾아온 날인지도 모른다. 그런 줄 알았다면 더 오래, 더 자주, 거울을 들여다보거나 그림이라도 남길 걸…. 아쉽다. 다만, 세월이 흘러 가끔씩 거울에 비친 나를 오래 바라보며 누군가 내게 ‘당신은 누구신지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에이징 솔로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시간과 함께 늙어가는 홀로 선 인간이지요. 깔끔한 대답을 할 수 있는 내 정체성이 만족스러워 나도 렘브란트처럼 희미하게나마 웃을 수 있게 된 것이 기쁨이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그리고 난 뒤 얼마 안 가 홀로 생을 마감했다. 부와 세속적 명성, 가족을 모두 잃은 그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놓고 허무하고 부질없는 생의 단면을 애도한다. 하지만 요즘 시대 죽음의 개념에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홀로 받아들이고 빈민공동묘지에 묻혀 심지어 이름이 새겨진 무덤도 남기지 않았다. 얼마나 무해한 말년의 인생이며 마무리인가.
그가 유독 자화상을 많이 그린 이유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나는 이 자화상만큼은 오로지 내 눈과 마음으로 마주하고 싶다. 그림 속 렘브란트의 주름과 흐린 눈빛과 희미한 웃음을 보며 마치 내가 그린 자화상이나 되는 듯 ‘나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이 또 떠오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