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내가 태어난 곳은 수원, 청소년까지 살았던 곳은 경기도 양주, 결혼해서 살았던 곳은 서울과 일산. 그 후, 전라북도 고산 마을에서 살아가는 중.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옮겨 살았던 지역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내 집이라고 살림하며 옮겨 다녔던 집은 적지 않다. 특히 결혼해서 10년 간, 그 뒤 세 아이와 강아지 고양이들까지 함께 서울과 일산에서 옮겨 다녔던 집이 가장 많았다. 이런 집 저런 집. 지금도 또렷하게 생각나는 별별 구조의 집들. 엄밀히 집이 아니라 방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래도 나중에 일산 변두리에 운 좋게 단독 주택에도 살아봤다. 다락도 있고 나무와 꽃을 심을 수 있는 마당 있는 집. 그뿐인가. 수도와 창고가 딸려있는 벽돌집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대문이 있는 오르막 골목길에 들어설 때마다 언제나 가슴이 설렜다. 집이다. 그런 느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은 그 집을 떠날 때까지 한결같았다. 그곳에서 막내아들이 성인이 되자 나는 시골살이를 택했으며 두 딸들도 각자 일과 상황에 맞춰 독립했다. 개와 고양이마저 각자 언니와 오빠를 따라 헤어졌다. 그러니까 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모여 살다가 때가 되어 흩어진 거다. 그 과정에서 함께 살 때 쓰던 오만가지 살림살이들은 나누거나 대부분 버려졌다. 다른 물건들이야 자신들 취향에 맞춰 새로 들여놓을 기대감으로 거리낌 없이 폐기 처분됐지만 가장 고민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사진이나 사진 앨범이었다. 사진 속 우리들은 행복해 보였다. 웃고 장난치고 귀엽고 예뻤다. 둘러앉아 함께 사진을 보며 또다시 우리는 웃고 떠들면서 행복해졌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이제 이 사진과 몇 권이나 되는 앨범을 과연 누가 가져가겠는가. 이 문제에서는 다들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시기는 달랐지만 본격적으로 이사가 진행되면서 사진과 앨범들은 각각 네 사람의 집으로 나뉘고 자연스럽게 해체되어 어느 집 서랍이나 액자에, 책갈피에, 또는 핸드폰 사진 갤러리(많은 사진은 여기에 들어가 있다.)에 자리를 잡았다.
가족사진에 가장 애착을 가져서 많은 사진을 보유하게 된 막내아들이 어느 날 내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흑백 사진 속에 우리 엄마, 아버지, 언니, 오빠, 나. 다섯 명 한 가족이 모두 들어있었다.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빨간색으로 기억되는 체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양 갈래 머리를 땋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는 내 뒤로 교복을 입은 언니 오빠들, 세 자식들을 품어 안듯 양 옆에 40대 엄마와 아버지가 활짝 웃고 있었다. 마음이 아렸다. 단지 이들이 모두 지금은 내 곁에 없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뒤로 보이는 덕수궁 건물과 플래카드에 적힌 ‘밀레 특별전’이라는 문구 때문이다. 서울과 그리 멀지 않은 경기도였지만 교통편이 아주 불편한 곳에 살았던 때, 좀처럼 가족들과 외출하기를 싫어했던 엄마가 어쩐 일인지 온 가족을 재촉해 데려간 곳이 바로 밀레 전시회였다. 그날의 가족 나들이는 특별했을 텐데 전혀 기억에 없다가 사진을 보니 뭔가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윤곽이 그려졌다. 우선 우리 엄마다. 중학교 교사였던 엄마는 다른 건 몰라도 집에 책을 많이 들여놓았다. 지금으로 따지면 카드 할부인데 그때는 공무원들 월급 때를 맞춰 조금씩 분할해서 갚는 형식으로 책을 팔았나 보다. 극도로 돈을 아껴 쓰는 엄마가 책 사는 것에는 빡빡하게 굴지 않았다. 책장도 동네 목수아저씨를 직접 불러다 벽에 딱 맞게 만들었다. 그 책장에 월부로 산 전집책을 번호 순서대로 정리해 놓았으나 우리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거나 강요했던 기억은 없다. 더구나 정작 엄마 자신도 집에서 책을 읽지 않았다. 언니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최대의 수혜자는 막내인 나였다. 어렸을 때는 북유럽동화책 전집, 청소년기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과 삼국지 수호지 전권, 대학생 때는 박경리의 <토지>를 내 방에서 뒹굴거리며 읽는 호사를 누렸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나는 우리 엄마가 본인이 읽을 것도 아닌 책을 왜 사들였을까. 그런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내게 주어진 혜택을 당연히 누리기만 했을 뿐 책을 사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 아들이 내민 사진 한 장을 보는 순간, 처음으로 엄마에게 질문하고 동시에 답을 알아버렸기에 마음이 아려왔나 보다.
“엄만 읽지도 않고 우리들한테 읽으라는 말도 하지 않을 비싼 책들을 왜 그렇게 샀어?”
“아, 엄마도 뭔가 예술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거야. 맞지? 그래서 유명한 화가인 밀레 원화가 왔다니까 평생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구나….”
온 가족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혀서 그 유명한 그림을 함께 보았다는 사진 한 장이라도 꼭 남기고 싶었던 거였구나. 다 같이 창경원 벚꽃 놀이 가자고 할 때는 그렇게 싫다고 하더니.
문방구만 보면 지나치질 못 하겠어. 들어가서 노트나 펜 하나라도 사 갖고 나와야 돼. 그렇게 사서 안 쓰고 쌓아놓은 게 집에 많아. 하는 친구들이 내 주변에 많다. 평소에 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시간상 도저히 읽지 못할 책을 잔뜩 사서 일단 쟁여놓고 흐뭇해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사실은 살다 보니 나도 그런 사람들의 대열에 살짝 발을 걸쳐놓은 장본인이다. 문구와 책은 꼭 써야만 하고 꼭 읽어야만 하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면서도 책을 안 읽는 엄마가 왜 책을 샀는지, 온 식구를 몰고 왜 전시장에 데려가 사진사에게 사진을 찍게 했는지, 그걸 이제야 묻고 대답하다니. 엄마, 미안해요.
엄마에게 더 미안한 건 내가 그 사진을 보고 사실 엄마보다는 우리 언니 때문이라는 걸 이제부터 말하고 싶어서이다.
우리 언니는 그림을 잘 그렸다. 언니가 고등학교 때 미술반에서 그린 수채화 그림이 아무나 그릴 수 있는 수준의 그림이 아니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미술반 선생님이 서울대 미술학과를 꼭 갈 수 있다고 엄마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엄마는 말없이 듣고만 있다가 전화를 끊었다. 결국 언니는 대학도 가지 않았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고 일찍 중매결혼을 하고 세 아이를 낳아 기르다… 지금은 내 곁에 없다. 밀레의 특별전을 보러 갔을 때 밀레 그림이나 전시장 분위기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깊이 각인된 한 장면이 있었다. 어떤 그림 앞에 똑바로 서있던 언니의 뒷모습이다. 교복에 단발인 여학생의 뒷모습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그림은 밀레의 어떤 그림이었을까. 어쩌다 그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왜 나는 당연히 그 그림이 ‘만종’이라고 단정 지었을까. 얼마 전 우연히 신문 자료를 찾다 밀레의 <만종>은 2007년 처음 한국에 전시되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어, 덕수궁 미술관에서 밀레 특별전은 1972년도에 열렸다는데, 우리 식구가 본 전시는 그때였을 텐데. 그럼, 언니는 밀레의 어떤 그림 앞에 그렇게 오래도록 서 있던 것일까.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왜 이렇게 내 마음을 아프게 할까. 언니… 정말, 정말 미안해….
밀레의 <만종>은 가히 세계인이 사랑하는 불멸의 그림이 되었다. 너무나 사랑받다 보니 거기에 내 개인의 뭔가를 더 얹을 수도 없다. 소설가 황정은 씨가 한 방송에서 말했다. 루브르에 사람이 너무 많아 오르세 미술관에 갔는데 밀레의 <만종>이 있더라. 너무 유명한 그림이라 아무 생각 없이 그림 앞에 섰는데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 울면서 서있었다. 그때 나는 황정은의 <일기>라는 에세이를 막 읽은 터라 그 모습을 떠올리며 울었다. 우리 언니가 보았던 그림이 <만종>이라고 쉽게 단정지은 게 미안해서 울었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막상 밀레의 그림 원화를 본다면 울 자신이 없다. 밀레의 다른 그림들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좀 격하게 말한다면 <만종>과 <이삭 줍는 여인들> 빼고 다 좋다면 괜한 허세와 객기 부린다고 핀잔을 받을 수도 있다. 아무렴 어떤가.
하루의 노동을 마친 농부 부부가 그날 수확한 감자 바구니를 앞에 놓고, 교회 종소리 속에 손 모아 기도를 올린다. 분명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멀리, 어둠과 빛이 교차되는 어스름한 해 질 녘 색채가 너무 사실적이라 아름답다. 어디 하나 흠잡을 수 없이 경건하고 숭고한 그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밀레가 본 이 장면보다 내게 각인된 두 장면이 더 아름답고 슬프다.
우리 마을에도 낮 12시(3분 정도 빠르거나 늦게)에 종을 치는 성당이 있다. 댕그랑 댕그랑 종소리가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들릴 때마다 웃음이 난다. 그런데 밀레의 <만종>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우리 마을 성당에도 저녁에 종을 치는지 궁금해졌다. 들은 기억은 없지만 창문을 닫거나 저녁 준비로 못 듣고 지나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성당에 다니는 신자에게 물어보니 도시에서는 아예 종을 치지 못하고 시골 성당은 그나마 낮에만 친다는 거다. 원래는 아침 6시, 점심 12시, 저녁 6시. 삼종 기도를 위해 종을 쳤으나 현대에 와서는 민원이 발생할까 봐 아예 종을 치지 않고 시골 성당에서만 낮에 한 번 종을 친다는 답을 들었다. 12시가 되면 자동 장치로 제작된 종이 울렸던 거다. 다 이해가 된다.
밀레가 그린 <만종>은 이제 내겐 한 장의 사진이다. ‘우리 가족‘으로 함께 살았던 어느 날, 밀레 특별전 전시장 앞에서 찍은 흑백사진이다. 네모난 사진 한 장이, 가족이었던 우리들이 시간을 멈춘 채 살아가는 집이다.
… 거칠고 축축한 뒤뜰 풀밭에 아빠와 엄마가 퀼트를 펼쳤다. 우리 모두 그곳에 눕는다. … 별들은 드넓고 살아있다. 별 하나하나가 달콤한 미소처럼 매우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사람은 화가, 삼촌은 집에서 산다. 한 사람은 음악가, 이모는 집에서 산다. 한 사람은 내게 다정한 우리 엄마, 한 사람은 다정한 우리 아빠. 어쩌다 여기에 그들이 있다. 모두 이 지상에 있는 슬픔을, 여름 저녁밤의 소리에 둘러싸여 퀼트 위에 누워 있는 슬픔을 누가 말할까? 우리 가족을… 하느님이 축복하시길. 아, 그리고 그들을 친절하게 기억하시길…
<제임스 에이지, 녹스빌:1915년 여름/천천히 스미는, 봄날의 책>
예전에,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이 대목에서 낮은 소리를 내어 몇 번을 되풀이 읽었다.
이제 내게 밀레의 <만종>은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다. 기도와 고백이다.
한원희, 우리 엄마. 오용호, 우리 아빠. 오영화, 우리 언니. 오영태, 우리 오빠.
댕~댕~댕~
가족의 이름만으로 그대들을 사랑했다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댕~댕~댕~
어린 내게 따뜻한 품이 되어 주고, 피난처가 되어 준 그대들…
댕~댕~댕~
지금은 어디론가 흩어져 새로운 시간 속에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을 그대들에게 온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전합니다…
대애앵~~~
부디,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