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파리에 정착한 지 5년이 조금 넘는다. 2년은 유학생으로 보냈고, 나머지 3년은 직장인으로 보냈다. 유학의 끝자락에서 석사 졸업장만 달랑 들고 금의환향이라 말하고 싶지 않았다. 프랑스에선 고작 2년을 살았을 뿐이고, 진정한 파리 생활은 제대로 맛보지도 못하고 프랑스를 안다고 우쭐대고 싶지 않았다.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니, 이방인으로 생활한 다는 건 참 녹록지 않은 일이다. 프랑스어로 소통 가능한 수준이어도 차별이 존재한다. 경제력이 있어도 프랑스인의 그 기세 앞에 주눅 들기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체류증을 신청할 때, 길거리에서 마그레브(북아프리카 중동지방 지역) 사람들의 추파를 받을 때, 정신 나간 사람들의 무차별 적인 언어 공격을 견뎌야 했다. 어디 그뿐일까. 파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지만, 겨울의 그 고독함은 느껴보지 않으면 모른다. 코끝이 시려오기 시작하는 10월부터, 만물이 녹아 초록빛을 이뤄야 하는 4월까지도 파리의 땅은 꽁꽁 얼어붙어 있다. 하늘은 구름으로 몇 만리를 에워싼 건지, 당최 해는 얼굴을 드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 가끔 햇빛이 나오면 너도 나도 햇볕을 찾아 테라스로, 공원으로, 길가로 쏟아져 나왔다.
유학생, 이방인, 이민자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사회적 약자를 우선으로 보호하는 복지국가인 만큼, 갓 도착한 이방인들에게 주는 혜택이 컸다. 처음 프랑스에 도착하고, 집을 구하고 월세를 꼬박꼬박 내기 시작했을 때 나에게 처음 이방인으로서 정당한 권리가 주어졌다. 주택 보조금이 나왔다. 나이와, 신분과, 경제력 및 거주환경을 고려하여 월세의 일부를 정부에서 돌려주는 시스템이다. 나는 프랑스의 법 앞에서 동등했고, 권리를 존중받고 있었다.
그런 나라에 직장인으로 일한다는 의미를 처음에는 잘 알지 못했다. 1789 프랑스혁명 때, 프랑스 선조들이 유혈사태를 겪어내며 쟁취한 그 권리를 시간이 흐른 뒤에야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9시 출근, 17시 퇴근이 당당할 수 있는 그 자유를 알았다.
1년 중 25일 바캉스를 쓰면서 2주 이상 휴가를 꼭 다녀오라는 의미를 알았다.
추가 근무 시에는 일한 만큼 휴가로 돌려받는 소중함을 알았다.
일정 규모 이상인 회사에서는 동료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팀이 꾸려질 수 있는 환경의 중요성을 알았다.
연배가 한 참 많은 회사 선배한테 내 의견을 표출하고, 나의 단점을 보완할 방법을 상처 받지 않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선물임을 알았다.
물론, 이러한 권리를 누리려면 프랑스 직장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월급의 3분의 1 이상은 사회보장세(건강보험, 퇴직연금, 실업급여, 교육세) 등으로 빠져나간다.
월급명세서에는 사회보장세의 명목으로만 30줄가량 있던 것이, 다행히도 2018년 개정되어 4줄로 간단히 요약된다. 끝이 아니다. 매년 5월에는 전년도에 벌어들인 수입을 신고하고 소득세를 납부한다.
책임을 다했을 때 자유를 얻었다.
나의 저녁 시간은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자기 계발시간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하며 즐기는 시간이 되고, 미래를 탐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