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은 어깨넓이 만큼 벌려야 합니다

퇴근시간 강남역 지하철

by 김현부

가을 벼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의 부지런함 덕분에

넉넉히 채워진 논에는 이미 벼가 가지런히 심겨져 있습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나야겠지만 윤기가 좌르륵 흐르는 하얀 쌀밥에 벌써 배가 불러오는것만 같습니다


바람에 일렁이는 저수지 물결에 햇살이 부셔져 눈이 부시는 기분 좋은 날입니다.


이렇게 해가 좋은 날이면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펴 봅니다.

비타민 D가 많이 생긴다나요?

와이프가 자주 하는 행동입니다.


얼굴을 쬐는 따가운 햇살도 손바닥에 떨어지면 부드럽게 느껴집니다.

은근히 따뜻해 집니다.

기분 좋은 느낌입니다.


월요일,

보통은 버스를 타면 집으로 가지만

이미 잡힌 일정 때문에 오늘은 집으로 가지 못합니다.


지금은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갑니다.

통학버스를 타면 대부분은 잠을 자거나 전화기를 봅니다.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창을 가리고 있던 차양을 끝까지 올려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푸르른 나무와

가볍게 흐르는 하얀 구름과

약간은 눈이 시린 파란 하늘이 멋진 날입니다.

버스를 타면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어 좋습니다.


그리고 버스전용차선 덕분에 천안에서 서울까지 1시간 정도 걸립니다.


5시정도에 출발했습니다.

양재역에 6시정도에 도착했고

죽음의 강남대로를 지나 강남역에 도착하니

6시 10분 정도 되었습니다.


이제 강남역에서 2호선을 타고 방배역까지 가면 됩니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데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습니다.

'뭐 강남역이니까, 그리고 지금이 퇴근...'

시계를 보니 6시 20분이 지나갑니다.


지하철 퇴근시간의 절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개찰구에 카드를 찍고 삼각봉을 밀어 승강장으로 갑니다.

코너를 돌아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승강장을 보니 숨이 턱하고 막힙니다.


최근 본 풍경 중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구밀도와 인구수입니다.


줄이 길어 맨 끝 어딘가에,

사실 그것이 줄인지 뭔지도 알 수없는 그 곳에 서서 전철을 기다립니다.

지하철이 두번 지나가도 타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입니다.


드디어 다음 지하철은 탈 수 있을것 같았지만,

뒤를 돌아보니 아까 만큼의 사람들이 다시 채워져 있습니다.


막 도착한 지하철에 문이 열리고 힘겨운 표정을 한 사람들이 쏱아져 내렸습니다.

기다리는 줄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간신히 그 모양만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왠만큼 사람들이 내리자,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것 같지 않던 줄이 지하철 안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그 물결에 휩쓸려 떠 내려 갔습니다.

물결의 힘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이제 다 들어왔겠지'하는 순간, 마지막 파도에 사람들이 밀려왔습니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누구하나 화를 내거나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모르는 사람인데,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되나?'할 정도로 우리는 가까웠습니다

X자로 서류봉투를 가슴에 들고 있었기에 손 위치 때문에 낭패 볼 일은 없어 다행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발입니다.


급하게 중심을 잡는 바람에 나의 왼발과 오른발은 너무 가까웠습니다.

중심을 잡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지하철이 출발하면, 난 꼴 사납게 넘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넘어진다'라는 표현보다는

'자빠진다'라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꼴 사납게 자빠질 것입니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넘어질 지 상상하던 그 때 지하철은 야속하게 출발했고

난 내가 상상하던 모습보다 더 꼴 사납게 뒤로 자빠졌습니다.


그 때, 본능적으로 누군가의 팔인지, 등인지, 어깨인지, 머리인지,

아! 머리카락이 없었으니 머리는 분명히 아니였을 것입니다.

어쨌던 누군가의 어떤 부위를 간신히 붙들고 구사일생으로 다시 균형을 잡았습니다.


서서 보니 누군가의 도움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일어서서 가장 먼저 발을 어깨 만큼 벌렸습니다.

또 꼴 사납게 넘어 질 수는 없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려 보니

또 다른 누군가와 아까보다 더 가깝게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와이프와도 이렇게 가까이 있지 않는 것 같은데 말이죠.


하지만 지하철에서 모르는 이와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오히려 묘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타인은 타인인지라 그 묘한 안도감은 이내 사라집니다.


지하철은 좌우로 움직였고

중심을 잃지 않으려 힘을 꽉 준 발가락에 쥐가 나려합니다.

간신히 발을 옮겨 다시 균형을 잡았습니다.


아마 그때 발을 옮기지 않았다면

분명히 발바닥에 쥐가 났을 것입니다.


그렇게 강남, 교대, 서초를 지나 방배역에 내렸습니다.

십여분간 강렬한 체험이었습니다.


사람이 그리울때, 그리고 혼자인 것 같을 때

출,퇴근시간에 맞추어 지하철을 타면 인류애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두 발은 꼭 어깨 넓이 만큼 벌려야 합니다.

꼴 사납게 넘어지지 않으려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