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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부 Sep 13. 2020

구두, 치즈, 그리고 당근

우리는 치즈를 먹을 수 있을까?

테디베어 인테리어 소품, 페라가모 여성 지갑, 아동용 아디다스 케리어 스타일 가방, 야마하 통기타, 리엔 흑모비책 자연갈색 염색약, 삼성 미러리스 카메라, 고운 발 크림, 선풍기, 자전거, 반 정도 남은 향수...


우리 동네의 당근 리스트에 아내는 더 이상 신지 않는 구두를 보탰다.


살 땐 적지 않은 돈을 지불했지만, 당근에 그 가격에 올릴 수는 없으니 가격은 2만 원으로 정했다. 올린 지 며칠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어 가격을 만 5천 원으로 내렸다. 그러자 연락이 왔다.


물물교환을 원하는 메시지였다. 구워 먹는 모짜렐라 치즈 두 개와 구두를 교환하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구두와 치즈를 교환하자는 획기적이며 시대를 초월하는 제안에 당황한 아내는 그건 힘들겠다며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배웠던 물물교환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 듯하였다. 그 당시 치즈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구워 먹을 수 있는) 결국 이 이야기는 신을 것과 먹을 것을 교환하자는 것이니 구두와 치즈의 교환이라는 언뜻 그려지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그리 이상한 교환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돈'이라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돈이 아니면 물건을 얻지 못한다는 말도 안 되는 개념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잠시 생각하던 아내는 구두와 치즈의 교환이 어색하기는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마침내 끝난 것 같았던 거래를 살리려 다시 메시지를 남겼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은 이러했다.


'구두와 치즈의 교환 제안에 당황해 힘들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ㅋㅋㅋ 죄송하지만 제가 물물교환은 처음이라 ㅋㅋㅋ 여전히 구두 원하시면 오셔서 신어보시고 결정하셔도 될 듯합니다. 그럼 연락 주세요~'


그리고 아내는 '당근!'이 울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상품들이 당근에 올라온다.


요즘 아내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하나둘씩 당근에 올리고 있다.


몇 번 입지 않았던 아이들의 옷가지들은 올리자마자 팔렸다. 하지만 별로 유명하지 않은 브랜드의 옷가지들은 가방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아이들의 옷들이 가방에 가득 담겼다.


아이들의 옷가지들을 정리하다 보니 아이들이 아주 많이 입어 헤어져 낡아 이젠 버려야 하는 옷은 한 곳에 따로 모아 두었다. 몇 번이고 눈이 갔다. 맡아봐야 낡은 옷 냄새 밖에는 나지 않을 테지만 옷에 코를 파 묻어 보았다.


이 옷들을 입고 뛰어다니며 웃고 울며 내 품에 안기던 아이의 얼굴들이 스쳐갔다. 나를 바라보던 아이의 얼굴들이 여러 시간과 장소를 배경으로 떠 올랐다.


낡고 헤진 아이의 옷을 버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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