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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부 Feb 09. 2021

아바와 베토벤 사이 어딘가에서

In between ABBA and Beethoven

거실을 중심으로 아이들의 방은 왼쪽, 와이프의 방은 오른쪽에 있다.

내 방은 이 집 어딘가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것이 남자의 인생이라면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어쨌든 오늘은 해가 참 좋다.


니 방도 내 방도 아닌 거실 창가에 앉아 아침 햇살을 받으며, 

언젠가 나에게도 산소가 나오는 날이 있기를 바라며 

며칠 전 큰 딸과 달리기를 하다 숨이 막혀 죽을 뻔한 사건에 대해 

가능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큰 딸을 따라 잡기는 불가능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난 지금 아바와 베토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큰딸은 한동안 잡지 않았던 베이스 기타를 다시 꺼내어 불꽃 연습을 시작했다. 손가락에 물집이 잡혀 벗겨지고 다시 물집이 잡혀 이제 굳은살이 되었다. 지난 3주간 카우보이 비밥의 테마곡을 들었는데, 처음 2주간은 0.75배속으로 그리고 지난 1주간은 1배속으로 들었다.


정신이 몽롱 해질 때쯤 곡이 바뀌었다. 참 고마운 일이다. ABBA의 Voulez-Vous라는 곡인데 신나고 듣기는 좋지만, 연주하기는 쉽지만은 않은 특히 인트로가 심상치 않은 곡이다. 인트로가 '따라 따라 따다, 뚜루 뚜루 뚜루 뚜~'가 반복되는 곡으로 베이스라인이 참 멋진 곡이다.


큰딸에게 무료 레슨을 해 줄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큰딸은 나의 레슨을 끔찍이도 싫어해서 도움이 필요할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큰딸이 트릴을 할 때 어떤 손가락을 써야 되냐며 물었고 나는 이렇게 하면 된다고 검지와 중지를 번갈아가며 트릴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큰딸은 자기는 검지와 약지로 하는 것이 편하다며 "ㅇㅋ, 땡큐~"를 날리고 나에게 나가 보라고 했다. 나는 불러줘서 고맙다고 혹시 다른 거 더 필요한 것 없냐 물었고 큰 딸은 쳐다보지도 않고 없다고 말했다.


본인만의 스타일과 성격을 개발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참 쿨한 성격이다. 마음에 든다. 중지면 어떻고 약지면 어떠랴 즐거우면 되었지... 한 이틀 지나고 나니 그리도 아바의 베이스라인은 제법 그럴듯하게 들린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의심은 하지 않겠다.


그렇게 왼쪽 방에서는 아바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작은딸은 피아노 학원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피아노 학원 선생님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작은 딸은 학원을 마치고 오면 언제나 피아노에 앉아 학원에서 배운 곡을 다시 쳐 본다. 몇 주간 연습하고 있는 곡은 베토벤의 소나타 8번 '비창'이다. 비장한 시작이다. 베토벤의 고뇌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베토벤의 고뇌가 내 고뇌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작은 딸의 연주를 듣는다.


비창은 '따~라 라 라 라~, 따다~ 라 라 라 라~'로 시작된다.


그래도 음악을 전공했다는 사람이 글로 표현한 음악이 기껏 해야 '따라 따라'라든지 '빠밤~'이라든지 아니면 '뚜둔~' 정도밖에 안되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마음이 편해졌다.


일단 음악을 글로 표현하고 나니 음악도 별것 아니구먼 하는 이상한 우월감과 쾌감이 밀려왔다. 악보의 오선위에 앉아 높은 콧대를 세우던 콩나물들의 실체가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따라, 빠밤, 뚜둔~'정도로 밖에 표현되지 못할 음악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하고 괴로워했나 생각하니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음악 별거 아니구먼...


별것 아닌 베토벤의 비창이 작은 딸의 손가락을 타고 울려 퍼진다. 

'따~라 라 라 라~, 따다~ 라 라 라 라~'

아주 희망적인 것은 처음보다 훨씬 좋아졌고 한 달 정도만 더 있으면 나도 베토벤도 행복할 것 같다.


지금 오른쪽 와이프 방에서는 고뇌에 찬 베토벤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사실 '고뇌에 쩔은'으로 적고 싶었으나 베토벤과 작은딸의 인격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적지는 않았다) 


그렇게 점심이 가까워질 무렴까지 난 왼쪽에서 울려 퍼지는 아바의 현란해서 어지러울 지경인 베이스라인과 오른쪽에서 고뇌하며 울부짖는 베토벤의 신음을 서라운드로 듣고 있다. 나의 뇌의 시넵시스로 전달되는 화학물질의 흐름까지 느껴지는 것 같다. '나는 기분이 좋다'라고 다짐을 했다.


큰딸을 따라 달리며 숨이 막혔던 괴로운 기억을 회상하던 것을 멈추고 하늘을 보며 큰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필요한 것은 크리스피 크림 글레이즈드 도넛 하프더즌과 따끈한 커피 그리고 있으면 좋고 없어도 죽을 것 같지 않은 슈퍼 울트라 하이퍼 액티브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이 참 좋은 하루다.


냥이는 머리를 감싸고 편안하게 쉬고 있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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