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을 증명하라는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우리 친구하자

by 김현부

자격을 증명하라는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산다는게 모든 것에 열려있고 모든게 가능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아닌것 같습니다.

내게 자격이 있나 스스로에게 물어 봅니다.

그리고 손에 땀이 나고 불안하지만 당신에게 물어 보고 싶습니다


당신과 시간을 보낼 자격이 내게 있나요?


일부러 혼자 있지 않으면 누구가와 항상 같이 있기 마련입니다.

무엇을 같이 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지 못해도 우리는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합니다.

그대의 존재가 나에게 방해가 되지 않듯이 나의 존재가 그대에게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밤에 혼자 달리기를 하다보면 무서운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럼 누구 없나 주위를 돌아봅니다.

그러다 저기 멀리 늦은밤 산책을 나온 부부가 보이면 마음이 놓입니다.

무섭지 않습니다.

사람이 있다는 자체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자체가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당신이 만일 여성이라면, 혼자 달리는 나를 보며 무서워 할 수도 있겠군요.

죄송합니다. 밤에 나와 뛰는 것은 되도록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라면 내가 사람인 자체가 당신에게 안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좋든 싫든, 타인과 장소와 시간을 공유합니다.

이왕, 해야만 한다면, 나의 존재가 우리 공유의 장소와 시간을 방해하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나요?


이 질문부터 심란해지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지내다보니 친구가 되어 있습니다.


계속 만나다보니 편해졌습니다.

괴로운 이야기도 하고

슬펐던 이야기도 하고

짜증나고 열 받았던 이야기도 하고

가끔 즐거운 이야기도 하네요.


그러다 보니

괴로우면 보고 싶고

슬프면 보고 싶고

짜증나고 열 받으면 보고 싶고

그리고 가끔 즐거우면 보고 싶어집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더 보고 싶어집니다.

친과 구사이에 자격이라는 단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네요.

다행입니다.


나는 당신의 남편이 될 자격이 있습니까?


참 괴로운 질문입니다.

나는 이 답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남편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냥 날 참고 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포기한지 오래된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왜 같이 살고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음...

불쌍해서?

이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부란 자격이 없어도 같이 살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격증명을 실패해도 기준이 너그러워 다행입니다.

D-를 받아야 하는데 C-를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C+가 되기 위해 노력은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겠지만 기대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자격'이라는 단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괴로우면 보고 싶고

슬프면 보고 싶고

짜증나고 열 받으면 보고 싶고

그리고 가끔 즐거우면 보고 싶어지는 친구.

옆에 있어도 보고 싶은 친구가 되었으면 합니다.


남편될 자격이 없기에 친구라도 되어야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습니까?


쉽지 않은 질문이 또 있네요.

음...

변명같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선택의 여지는 있었지만...


어쨌든, 아버지를 처음 해봐서 모든게 서툽니다.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또 변명같지만

당신과 같은 나이가 아닌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랬으면 우리는 아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니 흐르는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당신이 어른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당신이 자라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당신은 잘 모를것 입니다.

그 모습을 볼 수 있어 너무 감사합니다.

내 감동을 다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자라는 모습을 찍은 사진들과 내가 적은 몇 줄의 글을 남겨봅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꼭 보시기를 바랍니다.

자라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나도 자라느라 고생했던것 같아 당신의 마음이 이해가 될 듯 합니다.


당신이 싫어하지만 난 당신의 손을 잡는 것을 좋아합니다.

내 집게손가락 두마디보다 작았던 당신의 손이 내 손가락을 꼭 붙들던 그 느낌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제 내 손만큼 커져가는 당신의 손이지만 난 아직 당신의 손을 잡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든게 처음인 내가 아버지여서 미안합니다.

만약 당신이 마음을 넓게 열고 본다면, 아버지로서 실격일지 모르지만 친구로서는 나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넓게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괴로우면 보고 싶고

슬프면 보고 싶고

짜증나고 열 받으면 보고 싶고

그리고 가끔 즐거우면 보고 싶어지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어른이 되면 아마도 멀리 떨어질텐데 그 때 더 보고 싶어질까요?

난 그럴거 같은데...

당신의 대답을 듣기가 무서워집니다.


자격을 증명하라는 이메일을 오늘 받았습니다.


'우리 친구하자'라고 답장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