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라이프 시작
대학을 갓 졸업하고 사설 방송아카데미에서 구성작가 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EBS 방송국에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대학입시가이드’라고 하는 프로그램의 막내작가로 출연진 섭외와 간단한 취재, 자막정리 등의 업무가 주였다. 연예인같은 영역별 간판 선생님들과 일하며 인간적인 면모를 엿보는 재미도 쏠쏠했고, 대학 입시정보와 함께 학과 소개도 겸한 프로그램이었기에, 작가님~하며 반기는 대학생들을 인터뷰하러 가는 외부 촬영일에는 기분 좋게 콧바람도 쐬었다. 중요한 모의고사나 수능이 치러질 즈음이면 어김없이 ‘특집생방송’을 도맡았던 능력 있는 콤비, 차장님과 작가님 덕분에 생방송의 짜릿함과 특별수당의 짭짤함도 맛볼 수 있었다.
이렇게 적다보니, 그 시절 내가 경험하고 누렸던 것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게 된다. 그런데, 그때는 잘 몰랐다. 나는 글을 쓰고 싶은데, 수식어만 작가지, 내 업무는 글쓰는 일과 전혀 무관하다는 생각만 깊어졌다. 자막이 한 획이라도 틀리는 것에 병적으로 집착하셨던 차장님 덕분에, 자막뿐이랴, 맡은 일의 세세한 것까지도 더더욱 병적으로 재차 확인하며 군기가 바짝 든 이등병처럼 훈련받았다. 내 목표와는 너무 동떨어진 훈련과정에서 나는 얻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입시일정이 한 바퀴 돌아가는 일 년이란 시간을 채우자마자, 이거면 되었다 서둘러 마침표를 찍었다. 얼마 뒤 같은 방송국 다른 프로그램의 막내작가로 몇 달 더 일해 보았지만, 동일한 고민이 이어졌다. 나는 글을 쓰고 싶은데, 수식어만 작가지, 역시 이 일은 글쓰는 것과 무관하다는 생각만 굳어졌다. ‘내 꿈은 이게 아니야, 그러니 내가 있을 곳도 여기는 아니야’, 사회초년생이 내린 섣부른 결론은 이후에 만날 수많은 가능성과의 단절을 불러온 셈이다.
‘꿈은 크게’라는 생각은 창조적인 삶을 사는 데
건너뛸 수 없는 단계가 얼마나 많은지를 무시하고
그저 뜬구름만 잡는 것이다.
《아티스트 웨이》(p.246)
2020년의 내가 2005년의 나에게 무전이라도 칠 수 있었다면, 그저 이상적인 곳으로의 순간이동을 희망하며 불만족한 현재를 겨우겨우 살던 나에게, 조금만 더 나은 질문을 해보라 말해주었을 것이다. 고민이 깊었던 수많은 밤들 중 하루에 지지직 울리는 무전기를 통해 그 목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았겠나.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그림을 명확히 그린 후, 그것을 할 기회를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선배들에게 묻고, 내 길을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하면서 때를 기다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시절의 나는 ‘나 이거 마음에 안들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투정을 부리고만 있었으니, 그 점이 아쉽고 안타깝다. 지금 하는 일이 내 꿈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도, 내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그 일이 갖는 의미의 몫이 분명히 있다는 깨달음은 나이 들어서야 찾아오니, 이제라도 참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다.
단계를 밟자. 지금 그대로의 삶에서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바로 그것을 해보자.
답이 안 나오는 큰 문제에 빠져 있지 말고
작은 행동 한 가지를 매일매일 지속적으로 하자.
《아티스트 웨이》(p.248)
올 한해 디지털드로잉, 영어스터디, 칼림바연주, 아티스트웨이 워크숍, 독서모임 등을 조금씩 맛보며 여기까지 왔다. 그저 티끌만한 관심으로 시작한 활동들은 숙면하던 세포를 깨워주고, 주눅든 내면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도록 해주었다. 12월을 앞둔 시점에, 월 단위 프로젝트 소모임인 <함께 쓰는 다정한 글쓰기>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면서, 내가 이것을 위해 달려왔나 싶을 만큼 감격스러웠다. 앞선 과정이 없었다면, 내가 진짜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깨닫지도, 그것을 시작할 마음의 근력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12월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브런치라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나를 데려다 주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소중한 글 기대하겠습니다.”라는 커다란 문구 아래 ‘안녕하세요, 작가님!’이라는 호칭에 멈칫, 마법사의 주문 같은 한마디로 마법에 걸려버린 나는, 순식간에 15년을 거슬러 가, 한동안 감회에 젖어들었다.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수식어만 작가’인 호칭이 어색하게 들리는 건 매한가지다. 지금껏 신분을 고려해 그때그때 불리던 호칭이 내것이 아닌 것 같을 때가 많았다. 스스로 와닿지 않았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지속된 이력 없이 살아온 나에게 이제와 붙여줄 뚜렷한 호칭도 없다. 그런데 문득,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단계들은 그야말로 글쓰는 일과 아주 관련이 깊다는 사실 하나가 분명히 다가왔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와 제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 아들이 나를 수식해 준다면 그게 현재의 나에 가장 걸맞는 호칭이 아닐까 하는 자각과 함께.
아들의 입장이 되어 떠올리니, 아들에게 나는, 글쓰는 엄마다. 아무말대잔치인 모닝페이지를 쓸 때부터 엄마의 글쓰는 시간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다정한 글쓰기에 빠져 “이것좀 쓰고 해줄게~” 간절히 호소할 때는 아쉬워도 양보해 주었다. 새롭게 시작하게 될 글쓰기수업의 반장이 되었다고 했을 땐 물개박수를 쳐주었고, 하여 줌수업을 할 때 꼭 협조해 달라는 말에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게 아들의 지지를 업고 내가 제일 많이 보여준 모습이 글쓰는 것이었으니, 아들에게 나는 명실공히 글쓰는 엄마다. 글쓰는 엄마, 글을 쓰고 있는 나. 지금의 단계에서 나는 이 수식어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게 가장 맞춤한 옷을 입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