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의 이름은 내가 지어주었다. 한글 이름을 정해놓고 한자의 조합에도 유독 마음을 쓴 건 내 이름에 대한 고릿적 불만이 발동한 것이었는데, 아이가 크는 동안 빛나는 이름 석 자를 한자로 읽고 쓸 일이 없어서 처음 들였던 정성이 무색해지긴 했다. 내 학창시절만 해도 인적사항을 기록하는 주요서식에는 응당 한자를 병기해야 했으므로, 그때마다 나는 안 그래도 못난 옷을 입고 있는 내 이름을 탈의해 속옷인 채로 드러내 보이는 것 같은 수치심이 들곤 했다.
┃밝을 명(明), 남자 남(男)
이미 딸 둘이 있는 상태에서 뱃속의 아이가 딸인지 아들인지는 불분명했다. 엄마는 무언가를 직감하셨던 걸까, 산부인과에 갔는데 낙태비용이 영 비싸서 돌아오셨다고 했다. 아빠는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딸이 나왔단 소식을 듣고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셨단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을 숙명처럼 떠안고 살던 평범하고 융통성 없는 소시민에게는 충분히 절망적인 선고였으리라.
아빠가 내 이름을 짓기 위해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온종일 뒤적이셨다는 말로 위안을 삼아보지만, 내 이름의 ‘명’은 돌림자요 ‘남’은 운명 같은 낙인처럼 이미 정해놓았을진대 무엇하러 긴 시간 궁리하셨을까싶어 미심쩍기는 하다. 태어난 딸의 이름에 (더 이상) 딸자식을 원치 않는다는 의지를, 혹은 (다음엔 반드시) 아들자식을 원한다는 의지를 욱여넣는 식으로나마 미신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내 부모의 나약함을 신이 가련히 여기신 걸까.
3년 후부모님은 절절히 기다리던 아들을 품에 안으셨으니 결과적으로 내 이름이 그 값은 톡톡히 한 셈이다. 동갑내기 여사촌은 한두 해 차이로 여동생을 보았는데 할머니는 종종 나를 그 여사촌과 비교하며 “고치 달고 나와서 이뼈” 추켜세우셨기에 은근히 우쭐하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고추 달고 나온’은 내가 남동생을 보았다는 의미로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을 그대로 옮긴 것일 뿐, 혹여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이 글이 성정체성에 관한 글인가 민망하게 앞서가지 않기 바란다. 고추를 달고 있지 않았던 나의 탄생은 환영받지 못할 일이었지만, 고추를 달고 나왔다는 할머니의 인정은 나의 유년을 위로하는 듣기 좋은 칭찬이었다.
첫째 딸, 둘째 딸 다음으로는 꼭 아들이 태어나주길 간절히 바라던 집의 셋째 자리를 차지하고 만 나의 탄생비화에 많은 어른들이 딱한 시선을 보냈겠지만, 그런 류의 불편한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나는 ‘눈치가 빨라 고달픈’ 쪽보다 ‘천진해서 속편한’ 유년을 보냈지 싶다. 다만 머리가 커질수록 한자를 알고 쓰게 되면서, 내가 콕 쥐어박고 싶었던 뻐꾸기새끼 같은 존재는 바로 내 이름 자리에 밉상으로 들어앉은 ‘男’ 이었다. 이름에 ‘남’이 들어간 친구들이왕왕 있어동질감을 느꼈다가도 이름의 한자가'남녘 남'인 것을 알 게 되면 패자부활전에서마저 진 기분이 들었다.
그놈의 한자 때문에 오롯한 뜻마저도 없게 되어버린 내 이름 두 자는 성장기 내내 자주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통성명하는 자리마다 사람들이 이름의 뜻을 물을까봐 지레 얼굴을 붉히다가 어느 날엔가는 내 나름대로 용을 쓰며 기껏 만들어낸 의미가 '남자를 밝혀주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남자를 밝히나?"우스개소리를 던져서 내 낯빛에 불을 질렀지만, 차라리 그 해석이 나을 뻔했다.이렇게까지 의미를 구걸했나, 내 어리숙함을 안쓰러워하는대신 실소나 팍 터트리고 말았을 것 아닌가.
의미 없어 보이던 것인데 궁리를 거듭하면서 나만의 의미가 찾아지면 쾌감을 느꼈다. 살면서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들나의 못났던 행동들 하나하나 왜 그럴 수밖에 없었나 독백처럼 곱씹다보면 다 나름의 이유가 헤아려지고 최소한의 의미라도 찾아졌다.나에게 '의미 찾기'는 과거의 상처를 보듬고 미래에 소망을 두기 위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피할 수 없는 의식이었다.
나는 여전히 의미를 부여하는 데 시간과 정성을 필요 이상으로 쏟으며 몰두하는 편이지만, 요즘들어 그 오랜 습관을 재고하게 된다. 아이 이름을 지을 당시 그 뜻에 담고자 한 부모로서의 소망이 지나치게 거창하지 않았나 돌이켜생각하면서부터다.
베풀 선, 불빛 율.
막상 누군가가 ‘빛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라’는 기대를 내게 건다면 겁 많고 욕심 많은 나는 손사래를 치며 도망갈 것 같다. 진지하게 획득한 의미를 농담삼아 피해가고 싶은 나의 양면을 본다. 어떤 대상에 한껏 부여한 의미와 실재하는 마음과의 괴리가 생기니 그 의미값이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그렇다면부모의 일방적인 바람을 담아 대충 지은 이름이나, 부모의 일방적인 바람을 담아 정성껏 지은 이름이나, 매한가지 아니면 한 끗 정도의 차이지 않을까. 생각의 흐름을 타고 다다른 곳에서내 이름자에 심겼던 불만이 스르륵 꼬리를 내빼는 것도 같다.
인정하건대, 내 이름은 별 뜻이 없다. 하지만 내 이름에 부여한 나름의 의미는 이렇게 한 편의 글이 되었다. 내 아이 이름은 거창한 뜻을 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아이가 그 뜻대로 좁고 험한 길을 걸으며 살기를 대단히 바라지는 않는다. 이름의 가치와 존재의 가치를 분리하여 생각하게 되니, 이름이 존재를 규정하고 제한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자연히 힘을 잃었다.
‘예쁘지만 흔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불만도 '뜻없고 못생긴' 이름을 가진 사람 못지않은 걸 보면, 이름에 대한 불만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임이 분명해 보인다. 개명 절차가 간소화되어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나도 내 마음에 쏙 드는 이름을 가질 수 있겠지만, 개명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자리가 더 번거롭게 여겨진다.독특하여 쉽게 각인되는 내 이름의 장점을 들먹이며 개명하지 않을 이유를 혼자 따져본다.
뭐 다른 걸 다 떠나서, ‘명남’이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가족상과 자아상, 그 오래된 이야기는 부인할 수 없는 나의 일부이자 여러 말 없이도 깊이 헤아려지는 오랜 벗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