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 역에 관광 온 것처럼

간이역에서 안 설렐 수 있나

by 전UP주부



놀고 보고 자고 먹으며, 아이에겐 긴 비행부터가 오롯이 여행이었다.

비행기에서 맛있는 것도 주고 쉬도 할 수 있다는 걸 아주 만족해했다.



쫘악ㅡ

사지를 원 없이 뻗어 젖히는 스트레칭이 간절해질 때쯤 드디어 도착했다.

공항을 빠져나와 프랑크푸르트 역까지 이동 후, 다시 숙소를 찾아 도보로 이동하는데 방향을 조금 헤맸다. 키 큰 배낭을 짊어진 남편은 묵직한 케리어를 밀고, 키 작은 가방을 짊어진 난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었다. 울퉁불퉁 깎인 돌이 퍼즐처럼 끼워 맞춰진 보도블록은 유럽의 정취가 물씬 담겨 보암직했지만 바퀴를 끄는 데는 최악이었다.


이제 막 도착한 어눌한 티를 팍팍 내며 마치 프랑크푸르트 역을 목적지로 관광 온 사람마냥 근처만 자꾸 배회하던 중이었다. 지구 반대편에 날아와서 맞이하는 첫 구경거리이니 역 근처 지저분한 유흥가도 충분히 이질적이고 흥미로웠지만, 가도 가도 나오지 않는 숙소에 지쳐가던 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초행길이라 했던가.


당시를 회상하며, 내가 한 시간은 족히 헤맸을 거라고 뻥을 좀 보태면 남편은 길어야 이십 분 정도였다고 응수한다. 목적지를 찾기 위해 온 신경이 곤두선 사람에겐 10분도 1분처럼 흘렀겠지. 뒤에서 졸졸 따라가는 입장에선 구경하다 지루해질 틈마저도 길었겠지. 눈에 보이는 건물들과 휴대폰 속 구글맵의 상호작용에 비로소 적응한 남편이 제대로 된 안내를 시작했다. 나와 무관하게 흘러가던 풍경이 내 호텔로 가는 유의미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어미 품 같은 호텔 로비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남편은 체크인을 위해 동떨어져있고 나도 가방을 내려놓고 숨좀 돌리려는데

이럴 수가?!!!?!!!

내 가방이 입을 헤벌죽 벌리고 속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닌가!

아이고야. 도대체 언제부터 그 지경으로 걸어온 건지. 순간 안에 넣어둔 물건들이 스치며 간이 뚝 떨어져 방광 언저리에 치명타를 입힌 듯, 괄약근이 힘껏 당겨졌다. 여권? 아 여권은 남편에게 있지. 휴~ 헉! 새로 산 선글라스? 읔! 빌려온 디지털카메라는?


다행히 있.었.다.

혹시나 싶어 식겁한 물건들은 잘 있었다.

그럼 도대체 뭘 가져간 거지? 아무것도 안 집어갔을 리는 없잖아?

찬찬히 기억을 더듬으니 두 가지가 없었다.

여행자보험 설명서와 첫 개시한 핸드메이드 여권지갑.


아마도 횡단보도에서 기다리고 섰을 때였나 보다. 가방 열리는 느낌도 못 알아채고 난 무엇에 눈과 귀를 빼앗겼던 걸까.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나 여행객의 허술한 가방을 노리는 소매치기는 있게 마련이다. 역 근처였으니 더 조심해야 했다. 신의 가호가 있었다고 밖에...


돈봉투인 줄 알았니? 알지도 못하는 글씨만 잔뜩 써있는 종이 다발일 줄 몰랐겠지!

돈지갑인 줄 알고 후딱 낚아챘나 보군! 쌤통이다 이놈들아!!!


그렇게 안도하다 욕하다 오락가락하는 사이 뛰는 가슴이 달래 졌다.

더 조심하기를 스스로 거듭 당부하며, 큰 봉변은 아니었으니 털어버리기로 한다.






남편은 내 유심칩을 갈아 끼우고 예약 티켓, 철도이용, 주변 지리 등을 체크하느라 아직 긴장을 풀기 전이다. 나는 나대로 아이를 챙기는 내 몫에 충실한다. 아이의 장은 참으로 기특하게도 내내 먹은 것들을 이제 그만 내보내겠다는 신호를 마침 보내왔다. 여행 중 첫 응아를 이렇게 코지하고 안락한 호텔에서 맘 편히 치르게 된 것이 너무나 큰 은혜 같았다. 좁고 흔들리는 비행기, 입국심사 대기줄, 역사의 공중화장실, 아니면 그냥 길거리일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 어느 곳도 아니었던 것이 감사했다. 잘했네 잘했어 칭찬이 절로 나왔다.


시차 적응에 도가 튼 남편은 비행기서부터 수면을 조절한 터였다. 이동 중의 피로는 어느새 그를 깊은 잠으로 밀어 넣었다. 시차보다 본능에 충실했던 아들과 그의 템포에 무조건 맞춰야 했던 나는 밤이 늦도록 대낮 같은 컨디션을 어찌할 수 없었다. 놀다 지쳐 뒹굴다가 결국 새벽이 깊어져서야 눈을 붙였다.






비행기에서도 많이 자둔 덕분에 몇 시간 만에 다시 일어나는 건 생각보다 녹록했다. 버튼 하나로 한국 모드에서 독일 모드로 가볍게 전환된 듯 보이는 남편이 아침의 에너지를 뿜으며 왔다 갔다 준비를 서둘렀다. 몸은 일으켰고 잠도 더 자고 싶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정신은 가라앉은 안개처럼 무겁게 부유했다. 온몸에 퍼지는 시차의 존재감으로 불편함과 반가움을 동시에 느낀다.


내 몽롱한 정신은 조식을 먹으면서 안정을 되찾았는데, 한국 기준으로 자정을 넘긴 시간이다 보니, 좀 전까지 빵을 신나게 먹던 아이가 까무룩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빵도 먹고 사과도 반쪽 먹었으니 됐다! 아이가 잠들었다! 아싸! 유모차에 태운 그대로 호텔을 빠져나와 나침반의 중앙을 향해 반달음질로 길을 재촉했다.





프랑크푸르트 역전 시계는 아홉 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일상 속에 파묻힌 직장인들이 역 앞 광장을 무심히 지나며 출근을 서둘렀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나는 일탈한 여행자로 서있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파래서 여행자의 2일 차 아침을 더욱 달뜨게 했다.



바닥에 눌어붙은 껌딱지에서마저
특별함을 만끽하고 있다는
희열이 샘솟았다.




결혼 후 아이를 낳기 전까지 유럽 대륙을 두세 차례 밟았고 루프트한자 항공을 애용했다. 그때마다 프랑크푸르트는 항공편 때문에 거쳐가는 도시이지 관광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행이 시작되는 첫 도시였기에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늘 설렜다.



안녕! 초록신사!


방향 탐지를 끝낸 남편이 마치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처럼 비장하게 한 방향을 가리켰다. 들썩거리던 두 다리에 발동이 걸리자 전날은 그렇게 덜그럭거리던 유모차도 거침없이 쭉쭉 밀렸다. 점심 이후엔 뉘른베르크로 이동하는 열차를 타야 하기에, 프랑크푸르트에 머무는 시간은 앞으로 세 시간 정도가 남았다. 추억을 상기할 장소로는 한 곳이면 충분했다. 곧바로 뢰머광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다시 온 감회가 새로웠다. 그것도 아이와 함께 이렇게 오다니! 이런 날이 오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