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행 기차놀이

한 번의 타협은 한 번의 보상을

by 전UP주부



추억 따라 걷는 짧은 산책이 끝날 즈음 잠에서 깬 아들은 슬슬 유모차에서 내려오고 싶어 했다. 하지만 곧바로 호텔로 가 체크아웃을 한 뒤 기차 시간에 맞춰 프랑크푸르트 역사에 당도해야 했다. 아이가 유모차에서 내리는 순간 빠듯하게 계산된 절차의 타이밍을 절대 맞출 수 없었다. "기차 타러 가자. 기차역 가서 맛있는 아이스크림 먹자." 다행히도 아이는 엄마의 간절한 회유에 부응해 주었다.


관광하러 서두르는 발걸음과 놓쳐서는 안 될 스케줄에 쫓기는 발걸음은 천지차이다. 아침에 걷던 여행길이 살기 위한 생존길이 되었다. 이국의 시스템을 익혀 기차에 무난히 탑승하려면 미리 가야 실수도 만회할 기회가 있는 법. 여유 시간까지 계산에 넣느라 조급해진 마음에 남편과 나 둘 다 긴장모드다. 다행히 이변 없이 착착 진행되어 탑승장의 번호를 확인, 또 확인하고 나서야 한시름 놓고 아이의 빈 속을 챙겼다. 약속한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식사대용으로 소시지빵 등 간식거리도 준비했다.






아이는 유모차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욕구를 잊을 만큼 플랫폼에 정차한 기차에 정신을 쏘옥 빼앗겼다. '멈춰있는 기차'에 심드렁해질 기미가 보이면 혼신을 다해 아이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딴생각, 말하자면 걷고 뛰고 싶다는 생각,이 안 나도록 붙들어놓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연착이랄 수도 없는 단 몇 분의 지연도 길게 느껴졌다. 탑승을 마치고 나니 오늘의 거사는 다 치러낸 기분이 들었다. '움직이는 기차'에 새롭게 반한 아이는 창밖의 풍경을 한참(어디까지나 네 살 아이 기준으로) 바라봤다. 생애 첫 기차여행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예약된 기차 시간에 맞춰 잘 이동할 수 있을까?

기차만으로 큰 땅덩이를 가로질러야 하는 여행에서 가장 부담이 큰 지점이었다.


이렇게라면 남은 세 번의 이동도 충분히 잘 할 수 있겠구나!

기차여행에 흥미를 보이고 때때로 협조해 주었던 아이를 바라보며 안도감이 들었다.





긴장이 풀리니 그제야 내 속도 비어있다는 게 감지됐다. 소시지빵을 우걱 씹어 삼키며 이국적인 풍경을 눈에 담는....것도 잠시, 놀고 싶은 아이에게 적당히 반응을 해 준다. 두 시간 이상을 이렇게 가야 하나, 대안을 기대하며 건너편을 본다.


의자에 홀로 앉은 스케줄 케어 담당자는 창밖을 응시했다가 셀카도 찍고 인터넷 서핑을 좀 하더니 이내 잠을 청한다.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반응하면 되는 저 자리가 샘난다. 자리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지만 그래도 역할을 바꾸고 싶지는 않다. 그도 고단할 것이다. 잘 자라~ 대신, 숙소는 단번에 찾아가 주라!





프랑크푸르트에서 드레스덴까지 뻗는 독일 여정 중 두 번째 도시는
2차 세계대전의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한 재판이 열렸던, 뉘른베르크다.



드디어 자유를 얻은 아이는 두 다리를 총총거리며 걷다 뛰다, 역사에 전시된 미니어처 마을 앞에 멈춰 섰다. 마음이 바쁜 남편은 예약해둔 숙소를 얼른 찾아 나서고 싶은 눈치다. 나라도 조금 여유를 챙겨 아이가 스스로 자리를 뜰 때까지 기다려주자 마음 먹었는데, 그런 넉넉한 기다림은 점점 무모하게 여겨졌다. 내가 생각하는 '적당히'와 아이 입장에서의 '충분히'는 보기좋게 엇나갔으므로.


결국 아이는 장난감 자동차를 보러 가자는 말을 듣고 유모차에 냉큼 올라탔다. 남편의 내비게이션 스킬은 그새 진화되어 우리는 무난하게 숙소에 안착했다. 짐을 부리자마자 아이의 뇌 속에 각인된 '장난감 자동차'를 해결하기 위해 토이저러스로 갔다. 한 번의 타협은 한 번의 보상을 요했다. 어쨌거나 윈윈.





아이를 만족시킨 다음엔 부모가 만족할 차례. 간단히 때운 점심을 만회하기 위해 뉘른베르크 명물인 손가락 소시지와 추천 메뉴를 주문했다. 아쉽게도 내 구미를 당기는 만찬은 아니었다. 대체로 짭짤해서 평소에 즐기지 않는 맥주를 꿀떡꿀떡 마셨던 기억이 난다. 맥주의 나라 독일에서 입가심으로 마신 맥주가 전부였으니, 내가 생각해도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정말 야박하긴 하다. 여행 때마다 느끼지만 내 입맛은 익숙한 것에만 반응하기 좋아해서 다양한 현지식을 즐기기에는 늘 역부족이다.




배를 채우고 나오니 해가 좀 더 기울었다. 카이저부르크 성을 여유 있게 산책하다 석양을 볼 수도 있으리란 기대감을 품기 딱 좋은 시간대다. 울퉁불퉁한 바닥의 오르막길이 유모차를 끌기엔 버거웠지만 발바닥에 닿는 느낌은 벅차올랐다. 내가 유럽의 바닥을 딛고 있구나.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전경이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내 앞에 유럽의 지붕이 펼쳐져 있구나.





엄마 아빠의 감상이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돌바닥을 마냥 뛰어다닌다. 녀석도 발바닥의 감촉이 재밌었던 걸까.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뛰어다니면 어떡해. 넘어질까 노심초사다.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았고, 넘어져 다치는 일은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다. 휴~



내리막길에서 점점 속도가 붙는 신기.
계단을 한 발씩 성큼성큼 내려오는 성취.
손에 잡힌 이파리가 툭툭 뜯기는 재미.





여전히 태양의 기세는 다 꺾이지 않고 아직도 낮이라며 당당히 버티는 모양새다.

석양까지 보리라던 야심과 달리 내 생체리듬은 한국에서의 미련을 다 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이쯤 되면 가장 기다려지는 일정은 숙소로 돌아가 침대에 몸을 던지는 것.


여행 2일 차는 그렇게 조금 일찍 저물었다.